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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경비구역 JSA - Joint Security Area> 1/2  
J/S/A - Judgement/Sensation/Arrangement

1. Judgement

<공동경비구역 JSA>는 숲의 영화다. 나무의 영화가 아니다.

과거 대한민국에는 한 가지 이데올로기밖에 몰랐고, 또 그 이외의 것은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지상(至上) 목표는 사회주의에 입각하여 현실 사회를 뒤엎는 것, 곧 사회 혁명이었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세상은 그들의 소망에 대해 현실 사회의 몰락이 아닌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형태로 답을 하였다. 이제 그들은 따스한 햇볕 정책도 만발한 평화의 21세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계급적 연대로써 세상을 뒤엎으려던 현실 정치 노선이 실패로 끝장났을 때 그들에게 남겨진 것이라곤 사드식의 성 혁명뿐이었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권력을 '증오'하여 아버지를 살해하고자 했으며, 그 바탕 위에서 가부장적 가족주의를 해체한 다음, 철저히 여성을 배제한 채 오로지 형제애와 동지애로써 성(sex)이 아닌 성별(gender)에 의한 연대만을 고집했던 그들에게, 계급 연대에 의한 자코뱅주의적 사회 혁명의 실패는 극히 자연스럽게 젠더 연대에 의한 사드적 성 혁명이라는 축소-왜곡으로 매듭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까닭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소위 정치적 래디컬리스트를 자처하는 자들은 한결같이 동성애주의를 전면에 내세운다. 별안간 세상이 온통 이성애주의에 대한 저주와 호모포비아에 대한 혐오로 넘쳐나게 된 이유는, 그러니까 결국 자코뱅파에서 사드파로 당적을 바꾼 이들의 우수와 좌절과 원망과 증오와 분풀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현실 속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것은 -늘 그래 왔듯이- 부화뇌동하는 무리들이다. 그리고 비록 타락한 형식으로나마 사드의 꿈을 이루는 무리도 이들, '부화뇌동들'이다. 동성애자의 인권을 위한답시고 비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는 우리의 대책 없는 휴머니스트들, 서갑숙을 위시하여 성욕 자체의 전면 해방을 선포하는 우리의 대책 없는 프리섹스주의자들, 한때 호모포비아를 입에 담지 못하면 그건 평론도 아니라는 듯한 기세로 맹렬히 동성애 영화를 옹호하던 우리의 대책 없는 영화 평론가들. 따지고 보면 이들은 죄다 한통속인 것이다. 그리고 그 주변에 우리의 불쌍한 영화 감독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른바 포스트모던의 권태로운 일상에 찌들어버린 (척하는) 우리의 불쌍한 감독들은 이제 내가 보기엔 역사 감각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지경에 이른 듯하다. 좀 아름답게 치장해 주자면 그들은, 거대 담론에 의한 과학화를 일체 포기한 채 미시적 일상사에 열중하면서 문학적 역사 서술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은 오늘날의 역사가들을 본받아 또 다른 의미에서의 미시사(microhistory)에 열중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의 감독들이 일상의 미세한 국면을 관찰하여 서술한 결과는 미시사가들의 치열한 고뇌의 산물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저 밑바닥 수준. 눈만 가늘게 뜬다고 안 보이던 것들이 갑자기 보이게 되는 것은 아닌 것을…. 고작해야, 변태적 성행위에 대한 빗나간 천착[장선우의 <거짓말>], 고전과 전통에 대한 존중이라는 미명 하에 반복되는 구시대 유교 질서의 음미[임권택의 <춘향뎐>], 시종일관 사람들의 가장 드러운 모습('드러운'이라는 표현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원초적'이라는 고상한 학술 용어로 바꿔 보기로 하지!)만 골라서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여린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고약한 심보[김기덕의 <섬>]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본다면 지나치게 인색한 평가일까? 사회 전반으로부터 일상으로 시각을 축소시키고 선정주의에 온몸을 내던져 버린 장선우의 퇴행은, 그래서, 역사성과 역사 의식을 망각한 채 일상에 매몰돼 버린 우리 감독들의 일그러진 멘탈리티를 상징적으로 대변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공동경비구역 JSA>(이하 JSA)가 보여 주는 역사성은 오히려 신선하기까지 하다. JSA가 주류 영화에 불과하다는 폄하, 영화를 감독한 박찬욱이 제작사인 명필름의 단순 고용인에 불과하다는 평가절하, 영화광적 요소가 다분한 감독의 개인 경력, 그리고 그가 만든 영화들이 작가주의적 일관성을 띠고 있지 못하다는 회의적인 시각 따위는 JSA의 역사성을 논하는 데 있어서 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박찬욱은 그가 JSA를 통해 보여 준 연출력을 통해 자신의 역사 의식을 당대의 다른 감독들의 그것과 차별화시키는 데에 분명히 성공했으니까. 이는 남북 분단이라는 역사성을 배경으로 한 동시대의 다른 영화들, 곧 <쉬리>나 <유령>이 드러내고 있는 단순 일변도의 민족주의와 쇼비니즘, 그리고 <간첩 리철진>이 드러내고 있는 비현실적 낙천주의의 앙상한 몰골과 비교해 보아도 금방 깨닫게 되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그 동기야 어찌됐건 박찬욱이 JSA라는 영화의 감독을 맡았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근대라는 담론의 연장선상에서만 비로소 절절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남북 분단, 바로 그것을 소재로 삼은 영화 JSA. 그리고, 미시적인 일상의 삶 속에서 역사성을 망각한 채 그저 나무만 관찰하고 있을 뿐인 다른 감독들과 달리, 근대와 모더니즘의 찌꺼기인 남북 분단의 핵심으로 뛰어들어 바로 그 '현장'의 '인간'들을 '그럴 듯하게' 그려낸 감독 박찬욱. '역사 속의 인간'이란, 계보학적 단절과 해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획 앞에선 도무지 설자리가 없는, 고스란히 근대와 모더니즘이 구현해 낸 인간상이다. 박찬욱의 JSA는 따라서 역사의 연속성이라는 전제 하에 역사를 조망하는 숲의 영화일 수밖에 없다. 단절과 해체를 주장하는 나무의 영화가 결코 아니다.

그러나저러나 사드적 동성애주의자로 둔갑한 과거의 자코뱅파는 자신과 같은 뿌리인 JSA를 과연 어떻게 보고 있을까? 괜히 그냥 궁금해지는 걸~. ^^


2. Sensation

JSA는 너무나 슬픈 영화다. 하지만 눈물샘을 자극하지는 않는다.

김대중의 소위 햇볕 정책은 북조선 김정일의 이미지를 공산 괴뢰의 주구에서 옆집 사는 수다스런 뚱땡이 아저씨 정도로 180도 뒤바꿔 놓았다. JSA의 출현은 이렇듯 돌변해 버린 시대 상황이 가져다 준 자연스런 결과이다. 즉, 시대의 요청과 필요에 따른 산물이라는 것. 10년 전이라면 요구되지도 않았고, 또 필요하지도 않았을 그런 영화라는 것. JSA의 미덕은 이러한 요구를 그런 대로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소화해 내었다는 데에 있다. 특히 '남북은 한 민족!'이라는 감정적 민족주의의 정서에 함몰되지 않고 끝까지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했다는 점은 사실 칭찬받아 마땅하다. 학생들의 국사 교과서에서부터 -國史라는 단어 자체가 암시하고 있듯이- "민족이라는 초역사적 실체를 선험적으로 상정한" 채 역사를 "민족의 자서전"쯤으로 가르치려 드는 나라에서 남북 분단의 문제는 쉽사리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빠져들 운명을 타고났다고 볼 수 있다. 6.25를 가리켜 흔히 '동족 상잔의 비극'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점만 보아도 곧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JSA가 이러한 선험적 함정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 역시 높이 평가해 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JSA의 거리 두기의 성공은 부분적으로는 역설적이게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그토록 강조하는 바로 그 '혈통'에서 비롯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얘기인가? 입체성과 밀도가 부족하다 하여 JSA 폄하의 단골 메뉴로 오르다시피 하는 극중 캐릭터 소피 소령(이영애 분)을 상기해 보자. 사건의 책임 수사관이자 중립국 스위스의 군 정보단 소속 장교라는 성분에서 기인한 그녀의 중립적 시각은, 주위의 폄하가 무색하게도, JSA가 '역사적 허구/발명품에 지나지 않은 민족주의'에 빨려들어 좌초되지 못하게 막는 아주 효과적인 방패가 되고 있다. 즉, 영화를 관통하는 소피의 중립적 시각은 남북의 화해를 상징하는 초소병들의 뜨끈뜨끈한 우정이 관객에게 가져다 줄 수도 있는 감상적 시선을 가로막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피의 중립적 시각의 개입은 관객에게 거리를 두고 사건을 지켜볼 수 있게끔 영화적 장치를 마련해 주고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JSA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민족주의 정서에로의 벅찬 감정 이입과 진한 카타르시스를 차단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내가 보기에, 바로 이 소피라는 존재다. 이렇게 보면, 흔히 지적되는 소피라는 캐릭터의 입체성 결여는 오히려 당연한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소피 개인의 혈통이 6.25 당시 인민군 장교였던 아버지와 스위스인 어머니의 혼혈이라는 설정, 그리고 아버지가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석방되면서 남북 어느 곳도 아닌 제3국행을 선택함으로써 민족주의까지도 극복해 낸 탈이데올로기적 인물이었다는 설정을 알게 되고, 또 소피가 액자 안에 접은 채 감춰 놓았던 -철든 뒤로는 늘 그런 식으로 감춰 놓았을지도 모를- 아버지의 사진을 꺼내어 그 얼굴을 온화한 눈빛으로 들여다보는 장면을 목격하는 단계에 이르면, 관객은 소피라는 캐릭터의 딱딱함과 밀도 없음이 실은 소피 개인의 인생 여정에서 비롯된 불행과 그로 인해 내면에 쌓인 상처를 숨기기 위해 그녀 스스로 연출해 낸 의도적 행동의 소산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이제 관객은 분단의 아픔을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직접 자기 몸뚱어리로 구현한 소피에게 연민의 따스한 시선을 보내게 되고, 그럼으로써 소피는 그윽한 깊이를 가진 생명력 있는 캐릭터로 다시 태어난다. 결국 혈통의 확인은 오히려 감정적 민족주의의 정서를 부정하는 아이러니를 낳고 있는 것이다. 관객이 저며오는 슬픔 속에서도 눈물 앞에 백기를 들지 않고 냉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혹시 이러한 점들 때문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관객의 슬픔은 JSA의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그것은 비교적 뚜렷한데, JSA가 운명 앞에 내던져진 채 고뇌하는 인간 개개인의 모습을 그린 셰익스피어적 성격의 비극으로 마무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가 끝나고 자리를 일어설 때 뒷좌석의 젊은 여자가 자기 애인인 듯한 남자에게 이수혁 병장(이병헌 분)의 권총 자살을 두고 중얼거린 말을 잊을 수가 없다. "너무 허무하다. 그치?" 이 말을 뒤로 흘리면서 나는 나 자신 군인이던 시절에 느꼈던 가장 근원적인 정서에 한순간 몸을 내맡겨야 했다. 다름 아닌 바로 그 허무감. 고교 시절 읽었던 이문열의 중편 소설 <새하곡 塞下曲>에서 비교적 실감나게 묘사되었던 군인의 그 허무와 절망을 실존적으로 체감하게 되기까지는 10년이 흘러야 했지만, 어쨌든 좋든 싫든 난 그 감정을 군 복무 기간 내내 맛볼 만큼 맛보았다. 무엇이 한국의 병사들을 그토록 허무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실존을 철저히 구속하는 거대한 타율의 벽에 의한 것이 아닐는지.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느낌, 자기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좌절감. 거기서 시작되는 맹렬한 분노의 종착역은 결국 허무. 아무나 카뮈의 투사 시쉬포스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입대해야만 하는 한국의 병사들에게 군대는 감옥과 다를 게 없다. 그 감옥은 남북 분단이라는 실로 경이로운 세계사적 모순 속에서 수인(囚人)들에게 고통스런 선택을 강요한다. 비인간으로서 비굴하게 살아남을 것이냐, 아니면 인간으로서 깨끗하게 죽을 것이냐. 대부분은 북조선의 오경필 중사(송강호 분)처럼 너털웃음이라는 건강한(?) 가면 속에서 비굴한 생존을 선택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소수의 '인간'이 존재한다. 내가 이수혁 병장의 자살을 속 편히 지켜볼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죽음은 그저 구조주의와 실존주의라는 두 개의 딱딱한 철학적 코드를 상기시켜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기 실존의 절박함과 타인에 대한 애정을 '한 몸'에 체화(體化)시키는 것이 실패로 돌아간 후 좌절과 허무에 몰려 쫓겨가면서도 끝내 분열되기를 거부한 채 '한 인간'으로 남고 싶었던 어떤 수인의 슬프디 슬픈 최종 해결책으로 각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단순한 플롯상의 자살 이유 - 정우진 전사(신하균 분)를 죽인 자는 남성식 일병(김태우 분)이 아니라 이수혁 자신이라는 사실의 폭로가 이 비밀의 은폐를 기도했던 이수혁을 자살로 몰고 갔다는 감독의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허무. 허무는 어쩌면 '피투(被投)된 기투(企投)'로서의 현존재(Dasein)가 기투로서의 삶, 곧 본래성(Eigentlichkeit)으로의 결단에 실패했을 때 필연적으로 처하게 되는 운명 같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역사 속에 굳건히 선 인간'이라는 근대인의 확신에 찬 자아상은 근대라는 소위 미완의 프로젝트가 고안해 낸 한낱 창작품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위대한 근대의 자율적 인간은, 어느새 우리 주변 깊숙히 침투해 들어와 배회하고 있는 포스트근대의 이면에 내재한 허무주의라는 악령에 사로잡혀 그 수인으로 전락할 위험이 상존한다. 결단이 늘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 것 같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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