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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리 Swiri>를 다시 읽는다?
<쉬리>를 다시 읽는다?

이 글은 1999년 9월, 웹진영화 제18호 FILM FATAL 섹션에 위와 같은 제목으로 실었던 것이다. 독자들로부터 상당한 비판을 받았던 글이다. 당시 필자가 미학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면 독자들의 비판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며, 글의 전개 방식 또한 많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어쨌든 필자는 지금도 <쉬리>를 못 만든 영화라고 판단하고 있다. 2000/07/05.

서울에서만 무려 200만이 넘는 사람들이 떼거지처럼 몰려가 보아 주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쉬리>의 영화적 완성도를 냉정하게 평가할 수 없게 만드는 최대의 걸림돌이다. 그 200여만 명의 대부분이 영화에 대해 좋고 싫음을 표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화를 조직적으로 보는 훈련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고 보면, 수백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쉬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었다는 자체가 <쉬리>의 실체를 더더욱 모호하게 만들고 있을 따름이다. 게다가 국내 흥행 기록에 있어 지금까지 최고였던 미국 영화 <타이타닉>(서울 226만 명)의 기록마저 간단히 추월해 버린 경천동지할 사건으로 인하여 <쉬리>는 졸지에 일개 영화 수준에서 지천에 널린 애국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달구어 놓는 흠모의 대상으로 업그레이드돼 버렸으니…. 망하지 않고 버티기만 해도 그게 곧 애국이 되는 파산 경력 국가 대한민국에서 에베레스트 꼭대기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그 잘난 할리우드 영화들의 흥행 기록을 모조리 깨부수면서 승승장구한 덕분에 <쉬리>는 그 실체가 오로지 돈이라는 단 하나의 척도에 의해서만 평가받는 풍토 조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여기에는 영화 보는 데 있어서만큼은 일반 관객보다야 훈련된 객관적 시각을 갖고 있노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띨띨한 영화 평론가 '집단'도 한몫 하셨음이 물론이다. 어찌 보면 부추긴 감마저 없지 않다.

사실상 한국의 영화 평론가(이하 영평가) 중에서 <쉬리>가 보여 주고 있는 수준 이하의 영화적 완성도 그 자체를 문제 삼아 비판하고 나선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공식적으로 일관되게 영화적 완성도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사람은 내가 알기로는 딱 한 사람, 강한섭 한 사람 뿐이다. 한 마디로 영평가들은 집단적 직무 유기에 해당하는 죄를 저지른 셈이다. 그나마 개봉 초에는 작품성을 문제 삼으면서 '이상 과열'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간혹 있었지만[물론 그 목소리라는 것도 상당수가 얼치기 마르크시스트들의 얼치기 좌파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그러던 사람들도 관객이 수위 이상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자 자신의 평가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 강한섭조차도 자신감을 상실했는지 <쉬리>를 만든 강제규 감독과의 인터뷰 중, "사실 난 <쉬리>를 편하게 보지 못했다. 그런데 재미있다는 사람이 많았다. '내가 영화를 잘못 봤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면서 착잡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노릇 아닌가. 이렇게 자기 안목에 자신이 없어서야 그게 어디 프로라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자국 영화라지만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얘기한다는 게 그토록 어려운 일인가? 하여간 <쉬리>가 관객 몰이에 대성공을 거두게 되자 이들 영평가 집단은 눈에 띄게 소극적이 되어 갔다. 더 나아가 영화 보기의 생기본에 해당하는 면밀한 텍스트 분석도 아예 포기한 듯이 보였다. 결국 직무 유기라는 죄라도 면해 보기 위해 그들이 닻을 내린 곳은 유수한 전통을 자랑하는 레토릭(rhetoric)이라는 항구였다. 그러나, 비판도 아니고 칭찬도 아닌 어정쩡하고 애매한 수사(修辭)를 동원하여 그들이 해 놓은 것이라곤 속물들의 현학 과시용으로나 적합할 뿐 일고의 가치도 없는 담론의 쓰레깃더미나 <쉬리> 주변에 잔뜩 쌓아올리는 일 뿐이었다. 그 결과, 높다란 담론의 쓰레깃더미에 둘러싸이게 된 <쉬리>는 정당한 평가를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그만 쓰레깃더미에서 풍겨 나오는 유독 가스에 질식해 버리고 말았다. 하긴 텍스트 자체의 골격이 앙상하기 짝이 없는 마당에 텍스트 외적인 요소들을 잔뜩 끌어들여 치장해 준다 한들 빈약한 텍스트가 별안간 풍요로운 지적 보고(寶庫)로 탈바꿈하리요만….

<쉬리>는 한 마디로 잘라 말한다면 못 만든 영화다. 조금 좋게 얘기해 주자면 그냥 평범한 수준의 영화일 뿐이다. 아무리 좋게 얘기해 준다 하더라도 200만이 넘는 서울 사람들이 할 일 내팽개치고 한가하게 극장까지 찾아가 봐 줘야 했을 정도로 대단한 영화는 '정녕' 아닌 것이다. <쉬리>는 사방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무수한 허점들이 그대로 노출되는 영화다. 그러니까 일각에서 <쉬리> 성공의 으뜸가는 요인으로 꼽고 있는 "치밀한 시나리오와 장면 구성"은 애당초 사실과는 거리가 먼 어린애 잠꼬대 같은 소리라는 것. 일국의 비밀 정보 기관 최고 엘리트 요원이라는 작자들이 무슨 TV 방송국 헬기같이 생겨먹은 걸 타고 긴급 출동하는 장면이라든가 빨갱이 박무영으로 분한 최민식이 툭하면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면서 지겨울 정도로 남조선 탓을 해 대는 장면이라든가 미니어처 촬영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빌딩 폭파 장면 따위는 그냥 애교로 봐준다 치자. 도대체 이 영화가 일찍이 상업 영화에 경도된 감독이 할리우드적 장르 전략을 구사해 만들었다는 그 영화 맞는가?

설사 <쉬리>를 장르 영화라고 본다 해도,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첩보 영화라는 측면에서 본다 해도 <쉬리>는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자격 미달의 영화다. 특히 관객이 외국인일 경우, 즉 폼나게 바꾸어 말해 한반도의 정치적, 문화적 컨텍스트가 전혀 고려되지 않는 이질적 공간에서 상영될 경우 <쉬리>는 보나마나 삼류 첩보물 취급이나 받을 게 뻔한 영화인 것이다. 이는 거의 전적으로, 신파라 해도 할 말이 없는 멜로와 이방희(김윤진 분)에 지나치게 비중을 둔 편집 탓이다. 이로 인해 첩보물로서의 묘미가 거의 반감되다시피 하고 있으니까. 당장 눈에 띄는 것이 유중원(한석규 분)과 이장길(송강호 분)이 서로를 의심하는 데에 이르기까지의 대목인데, 두 사람이 서로를 의심하게 되기까지의 영화적 장치들이 앞서 말한 이유로 해서 너무 소홀하게 처리된 나머지 둘 사이의 불신은, 작위적 연출이라는 느낌밖에 안 드는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한 우정만큼이나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상당한 서스펜스와 스릴을 맛보게 해 줄 수도 있었을 훌륭한 소재를 고스란히 사장시키고 만 것이다. 그 결과는 첩보물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만한 '관객 긴박감 조성'의 실패. 이 뿐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감독의 역량을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은 밑도 끝도 없이 잘라먹은 박무영과 이방희의 극장 탈출 씬이다. 아니, 상업 영화를 추구하고 또 관객의 만족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사람이 갑자기 그 잘난 누벨 바그식 예술이라도 펼칠 요량이었단 말인가? 난데없이 이 무슨 해괴한 점프 컷? 화끈한 액션 내지 스릴이나 기대하고 극장을 찾았을 덜떨어진 관객들의 머리를 무자비하게 쥐어짜기 위해 악취미적 성향의 감독이 제공한 퍼즐 게임이었다고 하면 차라리 그럴듯하기라도 한데,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어처구니없게도 이 부분을 자신의 "실수"라고 말한다. "찍지 않은 게 아니라 상영 시간 때문에 잘라낸" 것이라나? 감독의 얘기를 좀더 들어 보기로 하자. "처음 내 호흡으로 (상영 시간을) 1시간 55분에 맞추리라 판단했다. 그런데 보통 영화의 두 배 길이인 250씬이 나왔다. 판단 미스였다. 그래서 그것을 줄이다 보니 생략이나 점프가 아니라 비약이 돼 버렸다."  이건 정말이지 변명조차도 못 되는데, 자신이 영화 연출에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한 것이나 다름없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상업 영화 감독으로서의 파산 선고인 셈이다.

<쉬리>가 두번째 영화인 강제규 감독은 안타깝지만 내가 보기엔 영화 연출에 별 재능이 없는 사람이다. 데뷔작인 <은행나무 침대>(1996)를 봐도 그렇거니와 그가 만든 극영화들은 밀도 있는 연출력이 떨어져 어딘가 허술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상업 영화의 생명이 관객들을 상영 시간 내내 영화 속으로 몰입시키는 데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은행나무 침대>나 <쉬리>는 그러한 점에서 일정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영화들이다. 개인적으로도 이들 두 영화를 보면서 내내 집중력을 발휘하는 데 상당한 곤란을 느껴야만 했으니까. 무엇보다도 재미가 없었다. 강제규 감독은 차기 작품으로 황당하게도 <은행나무 침대 2>를 염두에 두고 있다던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어쨌거나 말리고 싶은 심정이다. 차라리 강제규 감독은 지금부터라도 제작에 전념하면서 연출력 있는 후배들이 마음껏 놀 수 있도록 멍석이나 깔아 주는 편이 더 낫지 않겠나 싶은 생각도 든다. 한국 영화에 대한 이른바 온정주의 때문인가? 아니면 원색적으로 비판하는 걸 삼가는 패거리 의식 때문인가? 꼭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짚어낼 수 있는 강제규 감독의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어떠한 영평가도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서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는 다시 한번 한국의 영평가 집단을 불신하게 된다. 만약 공식적으로 강제규 감독의 연출 능력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영평가를 알고 계신 분이 있다면 필자에게도 속히 알려 주시기 바란다. 하루라도 빨리 불신의 늪에서 벗어나고 싶다.

영화 <쉬리>는 1999년 한 해 동안 국내에서 개봉했거나 앞으로 개봉할 영화들 중 최고의 성공작임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쉬리>는 결코 그 성공에 걸맞은 대우를 받을 만큼의 격을 갖춘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못 만든 영화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영화다. 그렇다면 못 만든 영화가 그토록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이에 대해 그간 숱한 사람들이 숱한 해석을 제시했지만, 그 어느 것도 만족스러운 답이 되지 못했다. <쉬리>의 산업적 측면이나 문화적 측면 따위의 영화 텍스트 외적 요소들에 너무 집착했던 나머지 <쉬리>의 실체를 지나치게 과대 포장해 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쉬리> 성공의 이유를 설명해 보겠답시고 제대로 이해도 못하면서 거창한 철학적, 사회학적, 심층 심리학적 담론들을 끌어들인다는 것은 정말 불필요한 짓이다. 알고 보면 <쉬리> 성공의 핵심은 놀랍도록 단순하다. 영화에 관한 한 터무니없이 증폭된 대중의 관심과 이를 뒷받침하기에는 절대적으로 역부족인 대중의 눈높이 덕분이었다는 것!  결국 <쉬리>의 폭발적인 성공은 한국 영화의 승리를 의미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한국 영화의 국제 경쟁력이 충분함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쉬리>의 성공은 아직까지는 우리나라가 문화적으로 여전히 삼류국이라는 사실과 함께 우리 관객의 영화 보는 수준 역시 이에 걸맞게 삼류라는 사실을 새삼 재환기시켜 주고 있을 따름이다.

강제규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대중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관객의 만족도다"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결국 그는 <쉬리>의 성공을 통해 자신의 지론(持論)을 입증해 보인 셈이 됐다. 관객은 <쉬리>에 대만족을 표시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문화 삼류국의 영화 감독이 어쩌다 같은 문화 삼류국 관객의 눈높이에 적절히 들어맞는 영화를 하나 만들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넘버 쓰리들의 나라 대한민국. 영평가 강한섭은 적어도 <쉬리>에 관한 한 딱부러지게 맞는 얘길 했다. "<쉬리>는 충분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많이 칭찬을 받았다. 관객이 많이 드는 것이 아무리 반가운 일이라고 해도, 작품에 대한 평가가 상찬 일색인 것은 문제다. 관객들이여, 기대치를 높여라." 확실히 맞는 말 아닌가? 하지만 기대치를 높이는 것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지나친 바람인지도 모르겠지만, 문화 일등국을 향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선 우리 관객은 영화 보는 '눈'까지도 높일 필요가 있다. 관객들이여, 눈을 높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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