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영화 보기
 <러브러브 Rub.Love> 1/2  
<러브 러브>? <럽 러브>? -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이 글은 1998년 2월, 웹진영화 제6호 ISSUE FILM 섹션에 위와 같은 제목으로 실었던 것이다. 당시 'IMF 쇼크'로 인해 너무도 놀란 나머지, 포스트모더니즘을 주로 경제적 논리로 해석한 마르크스주의에 안이하게 동의해 버린 우를 범한 글이다. 2000/07/24.

IMF 체제에 들어선 지금에야 비로소 우리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통찰이 옳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의 혼을 잠시 빼놓았던 포스트모더니즘은 순수한 문화 현상이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다국적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요, 다국적 자본의 자본 운동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순히 경제의 이데올로기적 상부 구조로서 경제적 생산 관계의 모순을 은폐하는 아편 역할만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곧 다국적 자본의 상품이요, 그 자체로서 곧 다국적 자본의 경제적 생산물이었다. 세계의 변방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주제 파악 못 하고 '세계화'를 목청껏 외치며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선진(?) 문화에 흠뻑 취해 있던 우리는 다국적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자 그 즉시로 쪽박 찬 거지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으며, 그제서야 우리는 우리가 중심부 국가들의 다국적 자본의 지배를 받는 변방의 일개 종속국에 불과했다는 참담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이제 남의 돈으로 부자 행세하는 놀음은 완전히 끝장난 것이다.

이서군의 <러브러브>는 이미 IMF 체제에 들어선 우리에겐 너무나 낯선 영화로 다가온다. 우리의 황량해진 마음은 우리의 황량한 마음만큼이나 황량하기 그지없는 이 영화를 묵인해 주고 받아들여 줄 만한 여유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만약 <러브러브>가 한 1-2년 정도만 일찍 우리를 찾아 주었더라면 이 영화가 간직한 실로 풍부한 포스트모던 요소들(이 영화의 거의 유일한 미덕이라고 봐도 무방할)로 인하여 어떤 식으로든 세인의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영화는 너무 늦게 우리를 찾아 왔고, 단지 그 이유로 해서 우리에겐 너무나도 낯선 영화가 되어 버렸다. 맹렬히 현실을 잠식해 들어가던 정신 분열증적 이미지 놀음이 이제 IMF와 더불어 산산조각 난 거울 조각처럼 무가치한 것으로 뒤바뀌어 버린 탓이다.

<러브러브>를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지에 의거하여 치장해 주고, 부풀려 주는 작업을 한다는 건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이 영화에는 -감독의 본의에 의해서건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건- 포스트모더니즘의 요소가 풍부하게 간직돼 있다(이 요소들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은 따로 글 말미에 부록으로 싣기로 한다). 그러나, 설혹 <러브러브>를 포스트모더니즘으로써 이론적으로 중무장시켜 준다 하더라도 이 영화는 유감스럽게도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그 껍데기와 이미지만을 빌려 온 듯한 느낌 밖에는 들지 않는 영화이다. 아주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잔뜩 무게를 잡은 것 이외엔 여러 시시한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이렇다 할 관심을 끌 만한 요소를 찾아보기 어려운 그저 그런 영화라는 것이다. 사실상 이 영화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거품과 현란한 테크닉을 걷어 내고 나면 남는 것이라곤 -한때 우리가 그토록 열광했던 왕가위 영화들이 그러하듯- 단세포적인 내러티브의 앙상하고 처참한 몰골뿐이다.

정말이지 <러브러브>는 그 얼마나 졸렬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가? 그 졸렬함의 수준은 초등학교 아동의 일기장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조잡함 그 자체여서 영화에 아무런 철학적 당위성도 부여해 주지 못한다. 거꾸로 얘기하자면, 관객은 영화로부터 아무런 철학적 당위성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두 추진력인 나나 역과 조한 역의 이지은과 안재욱, 이 두 배우의 연기는 그야말로 딱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정도여서 이야기의 졸렬함을 배가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안재욱의 TV 이미지들은 극중 조한과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으며, 이지은의 연기는 -개인적으로 배우 이지은에게 호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뻣뻣해서 감독이 일부러 경직된 연기를 요구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이에 더하여 감독의 테크닉에 대한 과잉 욕구가 내러티브의 졸렬함을 한층 빛내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앙상함을 더더욱 위태로워 보이게 만들고 있다.

<러브러브>가 이서군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 영화에서 감독이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테크닉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테크닉의 백화점식 나열과 무분별한 사용은 차기작을 찍기 위한 실험 혹은 예행 연습 혹은 밑거름으로서 감독에게 많은 것을 습득하도록 해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관객으로선 이로 인해 영화를 보면서 한바탕 고역을 치렀다는 느낌밖에는 들지 않는다. 물론 관객이, 내러티브의 흐름을 방해하면서까지 집착하고 있는 감독의 이 '테크닉의 현상학(?)'을 잠시나마 이해해 주는 살신성인의 자세를 유지한다면, 관객의 실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일부 터무니없어 보이는 연출-가령 예를 들어 아베크족 나오는 촌스런 1970년대 사랑 타령 영화에나 나옴직한 바닷가 연애 씬의 삽입 따위를 너그럽게 용납해 줄 수도 있게 될 것이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것도 데뷔작에 구태의연한 관습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모험을 감행할 만큼 어리석은 감독은 없을 테니까. 즉, '한번 찍어 보기 위해 찍어 봤다'라는 것. 돈도 많~다. 아마도 이서군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찍어 보고 싶은 장면은 죄 찍어 봤지 않을까 싶다.

이쯤에서 이서군 감독이 영화지 <키노>와의 인터뷰에서 한 다음의 발언을 살펴보기로 하자. 좀 길지만 모두 인용해 보기로 한다.

"주제가 언어로 집약되는 영화는 싫다. 인생을 보여 주면 그걸 느껴야지 왜 영화를 파고들고 그래야 하나, 생각한다. 영화는 글이 아닌데 글자로 박히면 안 된다. 사회의식적인 영화를 그래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너무 슬퍼, 그래서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어, 하고 인간을 그냥 그런 느낌으로 보여 주면 그 속에 사회도 있고 정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고 보여 주고 싶다. <러브러브> 역시 시나리오를 쓸 때도 기억이라는 개념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그건 그냥 나의 느낌일 뿐이다."
<키노>, 1998년 2월호, 181쪽.

감독들이 흔히 저지르는 이분법적 사고의 가장 기초적인 오류를 이서군 감독은 그대로 되밟고 있다. 바로 이성-로고스-언어를 감성-파토스-느낌(직관)과 철저히 구분함으로써 예술(영화를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을 협소하게 감성의 영역으로 제한해 버리는 것. 언어나 사유를 꼭 로고스적 이성의 기능으로 애써 국한시킬 필요가 있겠는가? 느낌이나 직관을 꼭 이성에 반하는 감성적/예술적 아우라(aura)의 반영으로 신비화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토록 포스트모던한 영화를 만들어 내놓은 감독이 "당신이 지향하는 영화는 어떤 것입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이토록 모던(!)한 발언/결론을 내렸다는 사실이 쇼킹하기까지 하다. 감독은 혹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기본 인식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러브러브>에서 포스트모던 요소를 찾아 내어 해설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작업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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