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cellany
 on BOOK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
-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 -

한국에서는 흔히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의 창시자로만 알려져 있는 에드워드 윌슨의 대작 <통섭 Consilience>을 읽어 내려가면서 나는 나름대로 윌슨의 사상적 초상화를 그려 보았다. 요컨대, 그는 과학적 유물론자이면서 계몽주의자이고 종교적으로는 무신론자에 가깝다. 인간의 정신 현상까지도 철저히 뇌라는 물리적 기반에 근거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과학적 유물론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으며, 인간이 언젠가는 객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면서 문화 상대주의나 구성주의 철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을 철저히 배격하고 있는 대목에서는 철 지난 듯이 보이는 계몽주의 철학의 유산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책에서 비록 스스로를 "종교에 관한 한 나는 이신론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밝혔지만 결코 초월적 유신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사실상 무신론자에 가깝다.

이렇게 그려놓고 보자니 윌슨은 영락없는 과학 숭배자인 것 같다. 게다가 그는 진화생물학자가 아닌가? 일찍이 유전학자 테오도시우스 도브잰스키가 "생물학의 어떠한 문제도 진화를 생각하지 않고는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얘기를 남겼듯이 진화라는 개념은 현대 생물학의 형이상학과도 같다. 아닌게아니라 윌슨은 생물학적 진화라는 대전제 하에 환원주의라는 유서 깊은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서 현재 파편화되어 있는 각각의 지식들의 통합, 즉 통섭을 추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언젠가는 인간이 궁극적 진리를 알 수 있게 될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인류의 정신사에서 완전한 앎에 대한 욕망은 늘 금기시되고 죄악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많이 알려 들지 마. 다쳐!"라는 가벼운 우스갯소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신처럼 전지전능해질 것이라는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 먹고는 에덴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의 얘기처럼 무겁고 심각한 종교적 설화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앎에 대한 욕망, 지식의 통합에 대한 추구는 매우 위험한 행위였고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그리하여 오늘날 통칭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아예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인간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지독한 회의주의의 늪으로 빠져버렸다. 이러한 진창 뒹굴기를 거부하면서 윌슨은 낡아빠진 듯이 보이는 계몽주의 정신을 제법 훌륭하게 복권시켜 인간은 결국 알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빛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만큼은 윌슨의 시도가 시도 자체로서는 정당한 평가를 받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지식의 '통섭'이란 간단한 작업이 아님이 자명하다. 오해와 불신, 증오, 심지어 적까지도 양산해 낼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윌슨의 압축형이 <이기적 유전자>라는 저술로 유명한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라고 생각한다. 도킨스의 책을 읽으면 윌슨이 복잡ㆍ장황하게 서술해 놓은 내용의 맥을 잡을 수 있다. 그만큼 윌슨과 도킨스는 사상적으로 혈연 관계에 있다. 그러나 압축과 단순화란 그만큼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도킨스는 아주 원색적인(발언의 수위 면에서) 과학주의자라고 봐도 무방할 듯싶다. 심지어 일각에선 그를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 빗대어 '다윈 근본주의자'라고까지 비판하고 있다. 도킨스와 더불어 윌슨 또한 진화생물학계의 반대 진영에 속한 스티븐 굴드나 리처드 르원틴 같은 정치적 좌파들로부터 거의 혐오에 가까운 공격을 받고 있다. 사회 생물학의 어떠한 측면이 그들로 하여금 우생학과 인종차별이라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윌슨에게는 도킨스와는 다른 뭔가 신중한 면이 있다. 그의 자서전인 <자연주의자>를 읽어 보면 그는 책의 제목답게 자연주의자, 즉 19세기 유럽의 박물학자와 같은 낭만적 열정을 가진 인물로 자신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그가 실제로도 관찰이라는 전통적인 귀납적 방법론에 충실한 야외생물학자답게 개미 연구로 명성을 얻은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윌슨의 자연주의자로서의 생물권을 대하는 태도의 신중함과 야외생물학자로서의 훈련된 시선이 도킨스와는 다른 미묘한 차별을 가져다 주는 것 같다. <통섭>을 읽어 보면 그의 이러한 직업적 신중함과는 또 다른 일종의 정치적 신중함을 엿볼 수 있다. 윌슨은 책에서 실로 끊임없이 절대주의나 파시즘, 인종주의에 대해 경계하고 또 경계하면서 되새김질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신중함은 1975년 윌슨이 <사회생물학>을 출간한 이후 그에게 글자 그대로 퍼부어졌던 좌파들의 공격이라는 혹독한 정치적 시련의 반대급부와도 같은 게 아닐까 싶다. 그는 자서전에서 당시를 회고하면서 자기가 정치적으로 순진했으며 어느 의미에서든 지식인이 아니었다고 토로한다. 일개 생물학자에서 지식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 혹시 <통섭> 저술의 시발점은 아니었을까?

한편, 윌슨은 예의 그 자연주의자로서의 면모로 인해 그가 자서전에서 1950년대를 그리면서 소위 '분자 전쟁'이라고 표현한 분자생물학과의 불화에 봉착해야 했다. 20세기 생물학 분야에서 방법론적 환원주의를 극단으로까지 밀어붙인 분야가 있다면 단연 분자생물학이다. 이러한 방법론적 극단은 분자생물학의 초창기였던 당시의 윌슨에겐 꽤나 생소한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도 분자생물학의 엄청난 성과를 그냥 무시해 버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윌슨의 이런 복잡한 감정을 나는 반대 입장에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의학을 전공하기 이전에는 미생물학을 전공했었다. 내가 학부에 적을 두었던 1980년대 한국의 미생물학계는 이미 분자생물학에 경도돼 있었다. 이른바 '센트랄 도그마'의 우아하고 단순한 정합성으로 똘똘 무장돼 있던 내가 의학의 길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처음 느꼈던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해부학은 열외로 하더라도 생리학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여기저기 덕지덕지 기워놓은 누더기 그 자체였다. 과격하게 얘기해서 생리학이란 인체의 각종 생리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개념들을 빌려와 닥치는 대로 끼워 맞춘 고철 더미 같다는 느낌을 좀처럼 지울 길이 없었다. 적어도 당시의 내 시각으로 봤을 때 이건 분명 과학이 아니었고 그저 현상을 설명하기에 급급한 해석학에 불과했다. 초창기 분자생물학자들이 기존의 생물학계에 대해 느꼈던 경멸 섞인 감정도 아마 이러한 류의 것이 아니었겠나 싶다.

이제 마무리를 하자. 파편화된 지식들의 통합은 필요하다. 그것은 윌슨의 말처럼, 인간 본유의 충동을 만족시켜 주는 것 이외에도 지성에 궁극적인 목표를 주기 때문이다. 단, 내가 보기에 한국에서는 이에 추가되어야 할 것이 적어도 하나 더 있다. 그것은 합리적 과학 정신의 심화이다. 과학 정신은 테크놀로지와는 성격이 다르다. 가령 황우석 스캔들로 유명해진 체세포 핵치환술, 일명 젓가락 기술은 다만 기술일 뿐 그 자체가 과학은 아니다. 과학 정신은 핵치환술이라는 일개 조작 기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수정란에서부터 시작되는 인간 발생의 역사를 탐구하는 전 과정에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 과학 정신이 결여돼 있는 곳에서 테크놀로지는 비판 없이 성역화하여 절대적 우상으로 변모해 버린다. 즉, 지식의 파편이 전지전능의 신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는 뱀의 유혹에 굴복하곤 한다. 에드워드 윌슨이 요청한 '통섭'은 우리의 이러한 조급증을 다독이면서 끝없는 인내와 기다림을 요구한다. 그러한 요구를 수용하게 될 때 마침내 우리의 의학 교육 역시 변화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파편화된 지식들은 서서히 서로 통합돼 나가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강의 시간에 수없이 들은 stem cell이라는 단어와 작금의 배아 줄기세포 논란이 머리 속에서 완전히 따로 노는 의대생이나 의사가 배출되는 괴상한 상황이 더 이상 연출되지 않게 될 것이다.  /2006년 1월 23일


   덧붙이는 말

이 글은 '청년의사'에서 주최한 제5회 독후감 대회에 응모하여 수상하고, 이후 '주간 청년의사' 제314호에 실린 것이다. 지금 와서 다시 읽어 보니 독후감이라기보다는 서평이나 칼럼에 가까운 글이다. 사실 독후감이라는 형식에 맞춰서 글을 쓴다는 것은 이제 내게는 무척 낯간지러운 작업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굳이 독후감 대회에 응모한 데에는 여기서는 밝힐 수 없는 나름의 사정이 있다. 어쨌거나 독후감의 범주를 제법 많이 벗어난 이런 딱딱한 글을 우수상으로 선정해 주신 심사 위원들의 관대함에 감사드릴 따름이다.

그간 거의 방치해 두다시피 한 홈페이지를 실로 오랜만에 업데이트하게 된다. 사실상 3년 만의 일이 아닌가 싶다. 2000년 홈페이지 개장 이후 지금까지 줄곧 호스팅 서비스를 받아왔던 네티앙이 올해 그만 파산해 버리는 바람에 새로운 서버로 이전하게 된 것이 직접적인 계기라면 계기이겠지만, 실은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던 탓이 크다. 그러고 보니 지난 3년간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결혼이라는 것도 하게 되었고, 예전부터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도 마침내 할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기나긴 미로를 이제서야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느낌이다. 정말이지 나도 이젠 행복해지고 싶다. 그만하면 이젠 행복해질 때도 된 게 아닌가….

기독교에 대한 나의 시각이 바뀐 만큼이나 생물 진화에 대한 나의 시각도 바뀌었다. 또 다른 도그마의 구축이라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또 경계해야 할 터이지만, 지금 현재로선 일단 과거의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워졌음을 즐길 따름이다. 이러한 자유로움 속에서는 선인도 따로 없고 악인도 따로 없다. 사람이 그냥 사람으로만 보일 뿐이다. 에드워드 윌슨 역시 마찬가지이다. 예전과는 달리 그의 지혜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심지어 그가 보이는 종국적 환원주의자로서의 한계에서마저도 배울 것은 많다. 배움의 길에도 역시 선인과 악인은 따로 없다.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다.  /2006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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