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cellany
 on CINEMA

퀴니코스적 에피큐리언 선언
Cynic Epicurean Manifesto


대한민국에서는 오늘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신성 영화(神聖映畵)의 망령에 사로잡힌 채 이 망령에게 바치는 신전 건설을 위해 자발적인 노예의 삶을 살아가고 있노라. 이미 노예의 삶에 순응해 버린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이 가차없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정신력마저 상실해 버릴 만큼 피폐(疲弊)해져 버렸으며, 신성 영화의 망령이 끊임없이 제공하는 소마의 감미로움에 길들여져 마침내 현실과 유리되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노라.

나 핀헤드는 이에 분연히 일어나 에피쿠로스의 아타락시아 정신, 그리고 안티스테네스와 디오게네스의 퀴니코스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대한민국을 온통 뒤덮고 있는 신성 영화의 망령을 퇴치하기로 결심하였노라. 이 망령의 위력은 지나간 과거의 마르크스 망령만큼이나 강력한 것이어서, 애통하게도 벌써 부산과 부천에 PIFFPIFAN이라는 무시무시한 악마의 소굴이 영광스런 영화 신(神)의 제전이자 신도(信徒)의 축제라는 미명 하에 각각 그 거점을 확보하였노라. 악마들은 이 두 거점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가 어디에서든 호시탐탐 발호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도다. 나 핀헤드는 이에 굴하지 않고, 사자처럼 울부짖으며 젊은 인민들을 노예화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이 악마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거사(擧事)하노니 뜻 있는 자들이여, 나를 따르라!



퀴니코스적 에피큐리언 행동 강령

大강령

퀴니코스적 에피큐리언은 자기의 견해와 목적을 감추는 것을 경멸하노라. 순수하고 냉정한 사고로써 현존재(現存在, Dasein)의 피투(被投)된 삶이 가져다 주는 고통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나 아타락시아를 유지함과 동시에, 기존의 모든 사회적 상황이 연출하는 어리석음과 몽매함을 철저히 비웃어 주고 조롱하라. 그대는 무자비한 비웃음과 조롱으로 만인, 곧 다른 모든 현존재들을 전율케 하라. 자신의 욕망과 집착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는, 도무지 피투성(被投性)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는 그들로서는 그대의 비웃음과 조롱 앞에 철저히 무력할 수밖에 없도다. 반대로 그대는 그대의 아타락시아와 자유를 구속하는 쇠사슬밖에는 잃을 것이 없나니…. 대한민국의 퀴니코스적 에피큐리언들이여, 단결하라!


小강령 - 10계명

신성 영화의 망령을 퇴치하기 위한 조치로 다음의 10계명을 교시하노니 마음 속 깊이 새겨 두고 힘써 익혀 성실히 실천해 나갈 것을 간절히 바라노라. 이는 어디까지나 신성 영화의 망령으로 인해 손상 입은 그대의 아타락시아를 회복할 목적으로 부득이하게 교시하는 것임을 명심하고 또 명심하라. 그대의 궁극적인 목표는 결코 신성 영화라는 일개 망령의 퇴치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노라. 신성 영화의 망령이 타파되는 그 날, 그대는 마땅히 그대의 아타락시아를 유지하기 위한 본연의 고귀한 임무로 돌아가야 할 것이니라.

1) 영화 보기를 철저히 즐기라. 영화는 보고 즐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무슨 공부나 노동의 대상이 아니다. 꼴리면 보고 안 꼴리면 안 보면 그만이다. 이에 대해 죄책감을 갖는다는 것은 퀴니코스적 에피큐리언의 치욕이다. 영화 보기는 유희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대는 이 유희를 통해 아타락시아의 함양에만 힘쓰면 될 일이다. 이를 방해하는 어떠한 것도 무자비하게 무시하라. 무자비하게 비웃고 조롱하라.

2) 영화는 가벼운 유희거리일 뿐이다. 유희는 즐거워야 하는 법. 유희를 즐기듯이 영화도 즐기라. 만약 영화 보기에서 더 이상 즐거움을 느낄 수 없게 됐다면 그대의 아타락시아를 위해서라도 냉정히 영화를 끊으라. 영화는 하찮은 것이다. 그대의 아타락시아를 파괴해 가면서까지 집착해야 할 아무런 가치가 없다. 즐길 수 없게 됐다면 영화를 무자비하게 무시하라.

3) 재미없고 지겨운 영화는 그대의 아타락시아에 악영향을 끼치므로 고통을 참고 끝까지 영화를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 실컷 욕을 퍼부어 주고는 극장 문을 박차고 나오든가 즉시 비디오 플레이어의 정지 버튼을 누르라. 이도 저도 귀찮다면 그 자리에 앉아 마음껏 코 골며 잠들라. 그럼으로써 그대의 아타락시아를 손상시킨 영화를 만든 놈들을 무자비하게 무시하라. 그대는 그럴 권리가 있다.

4) 영화를 유희가 아닌 심각한 그 무엇으로 우러러 떠받드는 무리에게 절대로 현혹당하지 말라. 그들을 철저히 무시하라. 그들은 그대에게서 영화 보는 즐거움을 앗아가고, 그대의 아타락시아를 파괴하려는 간악한 자들이니라.

5) 영화를 신성시하는 일체의 엄숙주의를 무시하고 또 무시하라. 영화에 대한 엄숙주의는 신성 영화의 망령을 찬양하고 숭배하는 것과도 같다. 다시 한번 말한다. 영화는 하찮은 것이다. 영화 보기의 하찮은 즐거움을 영화 읽기의 끔찍한 고통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엄숙주의자들의 음모를 경계하라. 이들은 그대로 하여금 영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좌절감만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게 할 따름이다. 이들을 무자비하게 무시하고 경멸하라. 비웃으라.

6) 소위 매니아나 평론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깡그리 무시하라. 이들은 신성 영화 신전의 사제이자 신성 영화의 망령을 불러오는 악마의 하수인이다. 이들은 영화에 대한 엄숙주의로 수많은 젊은 인민들을 현혹하여 신성 영화 강박증에 빠뜨림으로써 자신들과 동질의 인간으로 변질시킴과 동시에, 이들 젊은 인민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만들어 마침내는 신성 영화 망령의 제물로 바치려는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음모를 획책하는 무리이다. 이들을 무자비하게 무시하라. 이들에게 동정 따윈 필요 없다.

7) 매니아나 평론가들이 그대에게 보기를 강요하는 세계 10대 명화니 세계 걸작 100선이니 하는 따위에 절대로 현혹되지 말라. 이런 거 몰라도 영화 보고 즐기는 데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이런 유치하기 짝이 없는 리스트 작성 놀음은 일절 무시해 버리라. 한껏 경멸하라. 이러한 놀음은 초등학교 애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세계 10대 불가사의니 세계 10대 고층 건물이니 세계 10대 레슬러니 세계 10대 전투기니 하는- 괴상한 순위 매기기 놀이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만약 누가 혹시라도 그대에게 걸작 영화를 다섯 개나 열 개 정도 꼽아 보라고 하면 아무 대꾸도 하지 말고 경멸에 찬 표정을 지으라.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말하라. "덜떨어진 놈."

8) 현실을 카메라로 재현함으로써 감히 진실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고, 또 이를 통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는 이른바 사회주의적 리얼리스트들을 무시하라. 이들은 카메라의 개입 자체가 현실에 대한 조작이요, 왜곡이라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꼴통들이다. 이 꼴통들이 카메라를 통해 제시하려는 현실/진실이란 그저 꼴통들 자신이 보기에 진실이라고 판단한 것들을 취사선택한 잡동사니 조합물, 즉 꼴통들의 주관적 진실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대는 이 꼴통들의 엉터리 설법에 농락당해 스스로에게 사회 모순의 방관자라는 누명을 뒤집어씌운 채 자발적 죄책감으로 시달리는 우를 범하지 말라. 이는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영화는 보고 즐기라고 있는 것이다. 소위 사회주의적 영상 리얼리즘은 덜 떨어진 애들이나 좇는 철 지난 유행일 따름이다. 영화의 진실 운운하는 무리를 무자비하게 무시하라. 공공연하게 조롱하라.

9) 나쁜 영화가 사회악을 조장한다며 영화의 해악을 부르짖는 도덕주의자들을 무시하라. 이들로 인하여 사람들은 영화 자체에 사람을 악하게 변질시키는 엄청난 능력이 내재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망상을 품게 되었다. 이에 힘을 얻어 신성 영화의 망령은 더더욱 활개를 치게 되었도다. 도덕주의자들을 무자비하게 무시하라. 경멸하라. 이들은 영화가 범죄자를 양산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범죄자가 자신의 범죄를 위해 영화를 악용-영화상의 범죄를 모방-한다는 간단한 이치조차 깨닫지 못하는 바보들이니라. 다시 한 번 더 말한다. 영화는 하찮은 것이다. 그냥 즐기라.

10) 신성 영화의 망령에 홀린 눈먼 인간들이 모여드는 곳에는 절대로 가지 말라. 사악한 기운으로 인해 그대의 아타락시아가 심각한 위협을 받을 수 있다. 특히나 신성 영화의 사제와 무당들, 그리고 그 동조 세력이 득시글거리는 PIFFPIFAN과 동숭씨네마텍과 코아아트홀이라는 마굴(魔窟)에는 발도 들여놓지 말라. 그대의 아타락시아가 산산조각 날까 심히 걱정되노라.


이제 펜을 내려놓으면서 나 핀헤드는 사악한 신성 영화의 망령에 희생된 수많은 젊은이들의 명복을 삼가 빌어 마지않노라. 이들의 희생이 헛된 것이 되지 않도록 대한민국의 모든 퀴니코스적 에피큐리언들은 강령을 지침 삼아 대동단결하여 악을 분쇄하라! 나 핀헤드는 정의의 이름으로 신성 영화의 망령과 그 똘마니들을 용서치 않을 것이니라. 아멘.


 1997년 9월 15일.  핀헤드.


   후 기

이 선언문은 원래 1997년 9월, 웹진영화 제3호 BRAINSTORM 섹션에 실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찌어찌 기회가 되어, 1997년 10월 10일부터 10월 18일까지 열렸던 제2회 부산 국제 영화제(PIFF 97') 기간 중 전단으로 제작하여 부산 현지에서 뿌린 것이기도 하다. 지금도 여전히 웹진영화 크루(crew)로 활동 중이신 CYNICULT 님과 함께 해운대 개막식장과 남포동 극장가를 누비며 전단을 뿌리던 그 때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1997년에 PIFF 나들이를 했던 사람들 중 일부는 혹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소 우울한 표정의 두 사내가 A4 사이즈 전단지를 잔뜩 들고 돌아다니며 말없이 사람들에게 나눠주던 일을. 할 수만 있다면 다시 돌아가고 싶은, 필자에겐 얼마 안 되는 즐거웠던 과거 중 하나다.

1997년은 웹진영화가 창간된 해였다. 결국 이 선언문은 웹진영화의 장기적 생존을 위한 이론적 토대 내지 이념을 구축해야 한다는 필자 나름의 당위성이 빚어낸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부산 국제 영화제 기간 중 전단으로 제작하여 돌릴 생각을 했던 것은 인터넷이 지금처럼 대중화되지 않았던 그 시절, 웹진영화의 존재와 노선을 집중적으로 알리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물론 웹진영화는 공식적으로 그 때나 지금이나 어떠한 정형화된 노선이나 이념도 천명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선언문에 담긴 내용은 순전히 필자 개인의 주장인 셈이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애초 웹진영화가 일종의 '유희 정신'이라는 공통의 합의된 사항에서 출발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 웹진영화의 창간 멤버들은 영화라는 오락 행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국 사회의 모든 '얼치기 심각성'이 역겨웠으며, 영화가 갖는 유희로서의 속성을 되찾고 싶었으니까…. 유희, 곧 재미있는 놀이란 그 놀이 행위에 열중하면서 즐기면 되는 것일 뿐, 거기서 어떤 노선이나 이념이나 심각한 그 무엇을 도출하려는 시도 자체가 어리석은 짓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자면 또 다른 의미에서 이념 지향적이랄 수 있는 본 선언문은 엄연한 한계를 갖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본 선언문이, 예를 들어 카를 마르크스의 근엄하기 그지없는 '공산당 선언' 문체를 흉내내어 희화화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조롱과 풍자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유희의 본질을 크게 흐린 것 같지는 않으며, 그 시도 자체 역시 무의미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당연한 얘기지만, CYNICULT 님과 필자는 웹진영화의 '유희 정신'에 너무도 충실했던 나머지, 선언문 전단 제작과 배포 또한 즐겼다. 즐거움-재미를 느끼지 못했다면 엉뚱하다면 엉뚱하다고 할 수 있는 이런 짓을 애당초 했을 리 없다. 다른 크루들 역시 두 사람의 행동을 재미있어 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노선(결과적으로)을 한결같이 유지한다는 것은 재미 이전에 긴장을 동반하는 무척 힘든 일이다. 만약 본 웹 사이트에 실린 필자의 이런저런 글들이 독자로 하여금 '퀴니코스적 에피큐리언 선언'과 충돌을 일으키게 만든다면, 그건 결국 필자 자신도 지키지 못할 망발을 늘어놓았거나 혹은 필자의 입장이 그간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독자 여러분께서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200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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