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cellany
 on CINEMA
증오의 현상학 - 할리우드 영화의 경우

이 글은 1998년 3월, 지금은 사실상 폐간된 문화비평 웹진 '샨티'(www.saenal.co.kr/ ~shanti) 봄호에 역시 pinhead라는 필명으로 실었던 글이다. 많은 생각들을 한정된 공간에 압축하여 표현하려다 보니 글이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그저 단순 나열에 그친 감이 없지 않다. 원고 청탁을 해 오셨던 분께 지금도 죄송할 따름이다. 2000/07/01.

타인, 낯선 사람, 외국인이라는 존재는 그 존재 자체로서 인간에게 '생소하다'는 의미에서의 두려움과 거부감을, 나아가 적의마저 느끼게 만든다. 이러한 감정이 병적인 상태로까지 발전한 것을 이른바 '외래인 공포증(xenophobia)'이라 하는데, 정신 분석학에서는 자신의 무의식 깊숙이 억압해 왔던 것에 대한 두려움이 타인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으로 '투사'되어 나타난 병적 결과가 바로 이러한 외래인 공포증, 곧 증상 형성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굳이 정신 분석학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우리는 대개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타인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이러한 감정을 "타인은 곧 지옥"이라는 무시무시한 명제로 가공하여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자유 의지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사르트르에게 있어 인간이란 절대적 자유를 실천하도록 선고받은 존재이고 보면, 역시 절대적 자유를 선고받은 타인이란 존재는 나의 자유와 나의 자아실현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대상, 곧 '지옥'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초기 사르트르'는 인간 관계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적대적 갈등과 투쟁으로 보았으며, 자신의 존재와 그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완전히 정복하고 죽일(!) 수밖에 없다라는 음울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모든 생물학적 결정론을 거부하고 인간의 자유와 선택을 옹호했던 사르트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정반대의 길을 거쳐 바로 그 생물학적 결정론에 근거한 본능주의자들의 주장-인간은 선천적으로 공격적이며 파괴적이라는-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하긴 구약 성경 창세기에 따르자면, 문명이란 것 자체가 타인에 대한 증오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카인과 아벨이라는 인류 최초의 형제 관계가 카인의 증오로 인한 살인으로 결딴나 버렸음을 상기하라. 비록 형제간일지라도 지옥에 지나지 않은 아벨/동생/타인은 사멸시켜야 할 대상일 뿐. 존재 그 자체로서 나를 억압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타인은 나의 실존을 위해서 반드시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로지 그 길만이 내가 살 수 있는 길이요, 내가 더 이상 억압에 따른 신경증적 고통에 시달리지 않고 완전한 심리적 만족을 획득할 수 있는 길이다. 카인은 아벨을 쳐죽임으로써 잠시나마 자신의 실존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신의 저주를 받아 끊임없이 타인의 위협을 받으며 방랑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도시라는 이름의 문명'은 카인이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나아가 자신의 실존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한 방랑의 종착지였다. 인간의 인간을 향한 증오와 함께 출발한 문명은 이렇게 해서 그 증오와 더불어 성장해 나갔다.

타락과 저주로 인한 영원한 결핍 속에서 안식을 상실당한 피조물 인간은 자신의 생존과 실존을 위해 지옥인 타인을 향해, 지옥인 타지인들을 향해, 지옥인 타민족을 향해, 지옥인 타인종을 향해, 지옥인 타국가를 향해, 지옥인 타문명을 향해 증오를 키울 수밖에 없다. 카인이 그 후예인 우리에게 남겨 준 가장 확실한 유산이 바로 이것이다. 증오! 증오는 적의와 배척과 억압을 낳고, 충돌과 파괴와 파멸을 낳는다. 그것은 자신의 실존을 지키기 위한, 타락한 피조물의 처절한 몸부림. 그것은 인간이 본래 잔인하고 공격적이고 파괴적이라는 콘래드 로렌츠 같은 본능주의자들의 견해 따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것.

우리는 이와 같은 증오의 방만한 표현을 영화라는 형식을 통해 목격하게 된다. 특히 할리우드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적에 대한 무자비한 징벌과 심판을 상기하라. 절대적 적으로 규정된 타인, 곧 지옥은 증오의 대상일 뿐이며, 따라서 물리적인 폭력으로써 절대적으로 제압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할리우드 영화들 속에서 억압받고, 배척당하고, 마침내 쓰러져 가는 무수한 적/타인들을 한번 떠올려 보라. 서부 영화와 갱스터 영화에서 보안관/경찰/법에 의해 사살당하는 무수한 악당들/갱들/무법; 서부 영화에서 백인/문명에 의해 철저하게 괴멸당하는 인디언/야만; 전쟁 영화에서 자유 민주주의의 수호자인 아군/정의/선에 의해 패주당하는 적군/불의/악; 호러 영화에서 인간/이성/에고/광명에 의해 억압당하는 괴물/광기/이드/어둠; SF 영화에서 지구인/정상/백인에 의해 제거되는 외계인/비정상/非백인…. 수정주의 해석이 판을 치기 이전까지는 적/타인에 대한 이러한 영화적 응징이 당연한 것이었고, 또 이원론적 위계 질서에 근거하여 전자(법, 문명, 정의, 선, 이성)에 우월성을 부여하는 행위 역시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이었다.

할리우드는 고맙게도 우리/관객이 하등 죄책감이나 갈등을 느끼지 않고도 자신의 증오를 발산시킬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해 늘 애써 왔다. 그러니까 우리의 증오를 거리낌없이 표출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가공의 적을 끊임없이 발명해 왔다는 것이다. 냉전 시대에는 빨갱이에 대한 공포/증오를 외계인에 오버랩시키고, 탈냉전 시대에는 아시아인에 대한 공포/증오를 외계인에 오버랩시키는 재주를 부리는 식으로. 우리는 할리우드 영화에 열광할 수밖에 없다. 사르트르 명제의 완벽한 재현! 적에 대한 완전한 응징이자 타인/지옥에 대한 궁극적 제압인 '살인'이 아무런 죄책감도 요구하지 않은 채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완벽하게 재현된다. 이로써 증오의 부산물인 문명에 질식되어 신음하고 있는 우리 관객들/현대인들은 -살인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일부 사이코들은 일단 제외하고, 또 관객이 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백인이든 황인이든 상관없이- 자신의 억압된 분노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타인을 향한 증오를 간신히 표출시킬 수 있고, 또 간신히 해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문명은 계속 그 존속을 허락받는다.

증오의 자식인 인간은 그래도 역시 자신의 증오를 우회적으로 표현할 줄 아는 지성을 갖춘 존재다. 적에 대한 완전한 응징을 미덕으로 삼는 할리우드의 철학은 그래서 문명이 존속하는 한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효력을 발휘해 나갈 것이다. 할리우드를 무시하지 말자. 하일 할리우드! 

 
| TOP | HOME |
| FILM REVIEW | MISCELLANY | WHO IS PINHEAD? | MAIL |
Pinhead's World since 2000
Copyright © 1998 by Taekjoong Kim. All rights reserved.
This site is best viewed at 1024 * 768 resolution & 32 bit true color on Microsoft IE 5.0 or hig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