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c.
 <타이태닉 Titanic> 잡기장 1/2  
잡기장(雜記帳)

이 글은 1998년 3월, 웹진영화 REVIEW 섹션에 '<타이태닉 Titanic> 잡기장(雜記帳)'이라는 제목으로 실었던 것이다. 2000/07/09.

1. Titanic.

'타이타닉'이 올바른 표기인지 '타이태닉'이 올바른 표기인지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영미인들 발음에 충실하자면야 '타이태닉'으로 표기해야 옳을 것이다. 사실 외국어 표기는 그 현지 발음에 가장 근사하게 표기해 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타이타닉'은 이미 우리나라에서 관용음화된 지 오래. 혼란을 일으켜 가며 굳이 '타이태닉'을 고집해야 할 이유는 없다. 현지 발음에 너무 얽매일 경우 '타이타닉'은 말할 것도 없고 저 유명한 베트남의 영웅 '람보' 아저씨는 '램보' 아저씨로, 이브의 남편 '아담'은 '애덤'으로, 다윗 왕의 아들이자 패륜아인 '압살롬'은 '앱썰럼'으로, <터미네이터>의 감독 '제임스 카메론'은 '제임스 캐머런'으로 둔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나는 'Titanic'을 '타이태닉'으로 표기하기로 결심했다. 이유는 비교적 간단하다. 권위에 대한 인정/복종이라는 것.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다는 브리태니커 대백과 사전의 한글 역본, 그리고 이보다 앞서 출간된 우리나라의 동아 대백과 사전 양쪽 공히 'Titanic'을 '타이태닉'으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과 사전이라는 것이 애당초 서구 계몽주의의 소산이었고 보면, <타이태닉>이 개봉된 것을 계기로 이제부터라도 슬슬 '타이타닉'의 '타이태닉'으로의 대대적인 표기 개정 계몽 운동을 시작해 봐야 하지 않을지….


2. <타이태닉>은 절대로 보지 말자?

<타이태닉>에 대해 현재 국내에서, 특히 PC 통신망을 통해 일고 있는 이런저런 논란에 대해선 일단 무시해 버리기로 하자. 직배 영화라서 달러가 국외로 엄청나게 유출된다느니 그래서 금 모으기 구국 운동이 몽땅 도로나미타불이 된다느니 따라서 <타이태닉> 관람 거부 운동을 해야 한다느니 주연 배우 디카프리오가 한국은 지저분한 나라라고 흉봤다느니 하는 얘기들에 대해선 일단 신경을 끊자. 유희로서의 영화 보기가 이런 주변 잡담으로 인해 죄악으로 전락해 버려선 곤란하기 때문이다. 까짓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남들 눈치를 봐야 하고, 또 영화 보고 난 뒤 죄책감에 시달려야 한대서야 그게 어디 될 말인가? 어차피 볼 사람은 죄 보게 되어 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죄책감과 수치와 고통 속에서 영화를 봐야 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영화 보기는 유희다. 이 유희의 정신은 물론 천박한 군중 심리와 욕망의 쇠사슬로 인해 추악하게 변질될 가능성이 상존하지만, 그렇다고 그 정신을 짓누르고 박해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니까 보고 싶으면 마음껏 보고 즐기라는 것.

뭣이라? 아니 된다고? <타이태닉> 보지 말자고? 그거 보면 매국노라고? 웃기지 좀 말라! 금 모으기 같이 본말이 전도된 구국 운동과 <타이태닉> 안 보기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선 정말 곤란하다. <타이태닉> 안 보기는 '오로지' 현재의 IMF 체제에서 비롯된 우리의 수많은 좌절감과 뒤틀림과 분노와 증오가 <타이태닉>이라는 하나의 '희생양'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타이태닉>은 지금 우리의 모든 증오를 투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상, 곧 희생양으로서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사람들은 <타이태닉>에 대해 분명 적대감을 갖고 있다. 그 적대감을 증폭시키라! 그리하여 <타이태닉>을 희생양으로 삼으라! <타이태닉>을 죽여라! 다시 한 번 더 타이태닉 호를 수장시켜 버려라! 그럼으로써 맹렬히 끓어오르고 있는 당신의 증오를 분출하고 해소해 버려라! 문제는, 빵빵한 다국적 자본으로 무장한 <타이태닉>이 우리의 희생양으로서 얌전히 십자가에 못박혀 줄 것 같지 않다는 것. 우리나라같이 온통 폭발 직전의 증오로 충만해 있는 사회에는 그 증오를 쏟아 부을 수 있는 분출구로서의 역할을 갖는 공식적인 희생양 제도가 분명 필요한데…. 불안에 떨면서 언제까지고 만인의 만인을 향한 증오로 가득 차 있는 사회에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실현 가능성 없는 소망이긴 하지만, <타이태닉>이라도 어떻게 좀 죽어 줬으면 하는 절박한 심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런 한편으로 나는 이와는 지극히 상반된 감정, 즉 우리의 넘치는 증오로 인하여 그 증오보다 더 소중한 '유희의 정신'이 무시당하고 심지어 배척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빠져들게 된다. <타이태닉>은 본질적으로 -적어도 관객에게 있어선- 보고 즐기기 위한 대상이지 결코 화풀이의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3. <타이태닉>은 재난 영화인가, 혹은 소위 말하는 여성 영화인가?

1912년 4월, 타이태닉 호가 북대서양의 4000미터 심해로 침몰한 이래 8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타이태닉 호 침몰 사고는 그 역사적 비극의 선명함으로 말미암아 지난 86년간 여러 차례에 걸쳐 영화의 소재로 다루어져 왔다. 당시로는 최대 규모였던 4만 톤급의 초호화 여객선이 그것도 처녀항해 도중 빙산에 부딪혀 1,515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희생자를 낳으며 침몰해 버렸으니, 희생자와 그 유족들에게야 안된 일이지만, 이보다 더 좋은 영화 소재가 또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있어 타이태닉 호의 거대한 동체는, 이제는 아련한 추억 속에서만 살아 숨쉴 따름인 고귀했던 구시대의 영광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수장된 타임 캡슐과도 같은 존재로서 뭔가 형용할 수 없는 묘한 매력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듯하다[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세계 최대의 전함이었던 야마토에 대해 일본인들이 갖는 향수 또한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향수는 전쟁 중 미군에게 격침당해 태평양에 가라앉은 야마토를 만화로나마 부활시키는 데 한몫 하고 있는 바, 야마토의 활동 무대를 지구에서 우주 공간으로 옮긴 마츠모토 레이지의 유명한 만화영화 <우주전함 야마토>는 이 향수, 곧 군국주의의 분명한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1980년에 제작된 <Raise the Titanic>이라는 특이한 영화는 바로 이러한 감정들의 기반 위에서, 침몰한 타이태닉 호를 인양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의 노력과 열성을 묘사하고 있다. 마침내 인양에 성공하여 수면 위로 그 위용을 드러내던 타이태닉 호의 모습은 비록 영화상이긴 했지만 확실히 장관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불행히도 1985년에 실제로 해저에서 타이태닉 호의 잔해가 발견됨으로써 빛 바랜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영화에서 멀쩡한 모습으로 인양되었던 것과는 달리 실제 탐사 결과 타이태닉 호는 두 동강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제임스 카메론 감독에 의해 다시 1912년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간 타이태닉 호는 영화 테크닉의 발달에 힘입어 과거 어느 영화에서보다 화려한 모습으로 구시대의 영광과 몰락을 '재현'해 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카메론표 <타이태닉>은 역시 역사의 충실한 재현이라기보다는 이른바 '재난 영화'의 범주에 속하는 영화라 봐야 할 것이다. <타이태닉>은 어쨌든 지난 1996년과 1997년 두 해에 걸쳐 쏟아져 나와 다시 붐을 일으키는 데 성공한 재난 영화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영화는 1990년대의 다른 재난 영화들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우선 첫째로 이 영화는, 몇몇 평자들도 지적하고 있는 바이지만, 재난 영화이기 이전에 '러브 스토리'다. 타이태닉 호의 침몰은 그저 남녀 주인공의 애절한 사랑을 매듭지어 주기 위한 하나의 배경/현장으로만 작용하고 있을 뿐이니까. 둘째, 다른 재난 영화들-<트위스터>, <볼케이노>, <단테스 피크>, <데이라잇>, 심지어 <인디펜던스 데이>에 이르기까지-에서 재난은 그 자체가 남성 가부장적 가족제와 가정을 위협하고 파괴하려 드는 불가항력적이고 사악한 힘으로 설정되고 있으며, 남자 주인공이 그 재난을 극복하는 순간 강력한 남성 가부장으로의 복권과 가정의 재건이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타이태닉>에서 남자 주인공 잭은 다만 여자 주인공 로즈가 자기 실현(self-realization)을 완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에 머물고 있을 따름이다. 게다가 조력자로서의 임무를 다하는 순간 사멸하고 만다. 어찌 보면 <러브 스토리>, <선샤인>, <라스트 콘서트> 등등 우리에게 익숙한 사랑 타령 영화들의 공식-여자의 헌신적인 사랑과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결국 구원받는 남자-을 180도 뒤집어 놓은 듯한 이 괴상한 러브 스토리에서 남자 주인공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 카를 융의 논거를 빌어 설명해 보자면, 잭은 로즈가 자기(self)를 발견해 가는 자기 실현 과정, 곧 개성화(individuation) 과정에서 자신의 무의식 속에서 대면하게 된 아니무스(animus; 집단 무의식에 저장돼 있는 한 원형으로서 여성 인격 속의 남성적 요소를 의미함)였다는 것. 자신의 아니무스와 대면하여 이를 회피하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섭취한, 즉 의식화한 로즈는 타이태닉 호 침몰로 상징되는 호된 성장의 과정을 거치면서 근원적 자기에 보다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결과 한층 성숙한 인격을 갖추게 됨으로써 자신을 속박하는 과거의 모든 사회적 굴레를 과감히 벗어 던지고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늙어 할머니가 된 로즈를 빙 둘러싸고 있던 그녀의 빛 바랜 사진들은 그녀가 얼마나 진지하고 용감하게 인생을 살아 왔는가를 넌지시 암시해 주고 있지 아니한가? 결국 로즈의 무의식 속에 방치된 채 독립체로 활보할 수 있었던 '아니무스 잭'은 로즈의 의식으로 이끌어 올려져 로즈의 것이 되면서부터 자신의 독립된 주권과 경계를 상실당하고 종국엔 사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잭은 로즈를 위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

정리해 보자면, 다른 여타 재난 영화들에서는 여성이 마지막에 가서 기존 남성 질서에 재편입됨으로써 안정(?)을 되찾는 데 반해 <타이태닉>의 여성 로즈는 이를 전적으로 거부하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 <타이태닉>에서는 결코 남성 가부장적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묵시적 동의를 찾아볼 수가 없다. 여자 주인공 로즈는 시종일관 그 이데올로기를 혐오하고 부정하고 거부한다. 그런데, 남성인 필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안타깝게도 로즈의 이러한 거부는 남성 질서의 완전한 파괴, 곧 여성의 철저한 종속을 당연시하는 구질서의 상징인 타이태닉 호의 침몰, 곧 장래의 남편이 됐을 수도 있는 잭의 죽음을 통해서만 비로소 확보될 수 있는 것이었다.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 남성은 반드시 제거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남성은 여성의 영원한 적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남성 또한 여성의 증후에 불과한 것일까? 과연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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