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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타이태닉 호의 침몰이 의미하는 것
1) 구시대의 몰락과 붕괴
타이태닉 호 침몰 사건은 그 자체가 구시대의 몰락과 붕괴를 의미한다. 당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초강대국
대영 제국의 조선력과 기술이 총집결돼 만들어진 여객선 타이태닉은 그 거대한 동체가 곧 대영 제국의 위대한 힘과 광활한 영토를 상징했다. 그러나 타이태닉은 대영 제국의 몰락을 예고라도 하듯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불과 2년 전인 1912년, 첫 항해 중에 빙산과 충돌하여 허무하게 가라앉고 말았다. 그리고 2년 뒤 터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말미암아 대영 제국은 급속한 퇴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니까 타이태닉의
침몰은 결과적으로 대영 제국의 몰락을 재촉하는 불길한 전조였던 셈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은 하나의 역사적 분수령이었다. 그 후 대영 제국의 영화(榮華)는 물론이거니와 왕들과 귀족들과 신사들과 제국들의
세계였던 구유럽은 다시는 찾아볼 길 없는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제 힘의 추는 구세계 유럽에서 신세계 미국으로 옮겨가게 된다. 한 시대가 종말을 고한 것이다.
<타이태닉>은 구유럽의 시대상을 타이태닉이라는 선박 구조를 통해 드러내 보이고 있다. 즉, 타이태닉은 구유럽 체제의 축소판이자 알레고리라는 것. 영화상의 타이태닉 호는 실로 그 구조 자체가
당시 사회의 위계 질서와 계층 구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층부 수면 위에는 귀족들과 신사 숙녀들과 부르주아지만의 영역인 1등객실과 화려한 연회장이, 하층부 수면 밑에는 평민들과
온갖 시정잡배들과 프롤레타리아트만의 영역인 3등객실과 더러운 기관실이 위치한다. 그리고 이 두 영역/계층간에는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이 간극은 타이태닉 호의 침몰, 즉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구유럽 체제의 붕괴로 인해 일거에 지워져 버린다. 한 사회의 완전한 뒤집힘. 파멸의 공포는 부자고 가난뱅이고 할 것 없이 그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엄습해 온다. 이 비극의 현장에는 어떠한
인위적 위계 질서도 통용되지 않는다. 허공으로 치켜올려진 배의 고물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바다로 굴러 떨어지던 수도 없이 많은 승객들의 비명과 그 처참한 아수라장을 상기하라. 글쎄… 이러한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엥겔스의 상ㆍ하부 구조론에 충실한 이른바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혹 영화상에서의 타이태닉 호의 침몰을 놓고, 새로 발전된 생산력과 낡은 생산관계와의 사이에 모순이 심화되고 그에 따라
계급적 대립이 격해지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회변동 상황의 역사적 은유라느니 어쩌니 하면서 신나게 떠들어 댈지도 모르겠다. 하긴 적어도 타이태닉이 침몰하던 그 당대까지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엥겔스의 통찰이 그런 대로 타당한 구석도 있긴 했으니까.
여하튼 <타이태닉>은 미국 영화답게 구유럽의 노빌리티(nobility) 정신에 얼마간의 조소 내지 냉소를 보낸다. 이
영화에서 구시대의 미덕이었던 고상함과 고결함은 모두 도덕적 위선 행위로 무시당하며, 구질서는 오로지 여성과 평민과 프롤레타리아트를 억누르고 지배할 뿐인 억압 체제로만 파악된다. 이러한 관점은 여주인공
로즈의 약혼자 칼과 로즈의 애인 잭과의 대비를 통해 뚜렷이 드러난다. 상류층에다 거부(巨富)인 칼은 부정적 의미에서의 구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서 오로지 자본의 논리에 의해서만 행동하는 속물이며,
철저히 여성 위에 군림하려 드는 위선자다. 이에 반해 최하류층일 뿐만 아니라 빈털터리인데다가 천대받는 아일랜드인이기까지 한 잭은 섬세한 예술가의 영혼을 가진 화가로서 모든 사회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방랑자이며, 여성의 자상한 동반자이기도 하다. 로즈의 칼/대영 제국/구체제에 대한 반발 심리와 잭에 대한 전폭적인 사랑은 잭의 속성에 상대적 우월성을 부여해 주며, 이 우월성은 기회의 나라 미국으로 가기 위해
타이태닉 호에 승선한 대영 제국의 평민들과 잭이 보여 주는 자유분방함을 통해 결국 미국식 자유 민주주의의 승리를 선포한다. 그러니까 유럽식의 귀족적 고상함보다는 미국식의 대중적 천박함이 더 가치 있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 연회장에서 형식적인 데 지나지 않은 대화를 자못 진지한 듯 나누는 칼과 다른 신사들의 딱딱하고 위선적인 모습을 담은 숏을, 3등칸에서 벌어진 잔치에서 잭과 로즈가 다른 3등칸
승객들과 자유롭게 어울려 신나게 춤추는 모습을 담은 숏과 크로스 커팅 편집한 것을 상기하라. 이러한 일방적 관점은 시종일관 이어져, 침몰 직전까지도 자신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 상갑판에서 연주를 하던 악사들,
마지막 순간까지도 품위를 지키겠다며 정장 차림으로 태연히 죽음을 기다리던 노신사 등등 구시대의 모든 영웅적 행위가 조롱조의 시선으로 일괄 처리돼 버린다. 그리고 이제…
타이태닉의 침몰과 함께 사라져 버린 노빌리티 정신은 구시대를 상징하는 루이 16세의 다이아몬드와 더불어, 이제는 늙어 할머니가 된 로즈라는 한 여자의 추억 속에나 희미하게 간직돼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 희미한 추억조차도 로즈에 의해 북대서양 한복판에 내던져진 다이아몬드와 함께 영영 찾을 길 없는 과거 속으로 가라앉고 만다. 마치 루이 16세가 프랑스 혁명으로 기요틴에서 참수당함으로써 앙시앵
레짐, 곧 구체제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듯이.
2) 여성의 해방
앞의 3장에서도 언급했듯이 타이태닉 호의 침몰은 남성 가부장적 구질서의 몰락과 붕괴를 의미한다. 거꾸로 이는
그간 남성 가부장적 권위에 짓눌려 지내 왔던 여성들의 해방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는 것. 서구,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19세기 초부터 벌어졌던 이른바 여성 운동의 초기 형태인 여성의 참정권 요구 운동이 마침내
그 결실을 맺게 된 것도 대략 타이태닉 호가 침몰했던 그즈음의 일이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구체제에 균열이 생기면서 여성의 선거권을 인정하려는 경향이 가속화되어 1920년대까지는 서구 대부분의
국가들이 여성 참정권을 승인하게 되었다. 신여성의 표상과도 같은 존재인 여주인공 로즈는 타이태닉 호의 침몰과 함께 도래한 새시대의 혼란 속에서, 구시대의 억압적인 남성 가부장제로의 순응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한 끝에 자신의 위상과 존엄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서구에서 거의 1세기에 걸쳐 진행됐던 여성 참정권 운동의 역사 역시 그러했다.
5. 타이태닉? 타이탄?
타이태닉/Titanic은 주지하다시피 타이탄/티탄/Titan의 형용사형이다. 타이탄은 일반적으로 '거대한 것'을 의미하는데, 원래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신족(巨神族)'의 통칭이다. 신화에 따르면
타이탄족은 태초에 카오스에서 나온 가이아(땅)와 가이아의 아들 우라노스(하늘) 사이에서 태어난 일족으로서 이들 중 막내인 크로노스가 가이아의 지시로
우라노스로부터 지배권을 빼앗아 세상을 다스린다. 그러나 크로노스 역시 자기 아들인 제우스와 그의 형제들 곧 훗날의 올림포스 신들에게 자리를 찬탈당하여 쫓겨나게 되며, 다른 타이탄 일족들 또한 도망가거나
숨거나 제우스의 중벌을 받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 어깨로 하늘을 떠받드는 벌을 받게 된 그 유명한 아틀라스가 바로 이들 타이탄족의 일원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주류 올림포스 신들의
부모 세대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타이탄족은, 원래는 그리스 선주(先住) 민족의 신들이던 것이 나중에 그리스인들의 신화 체계에 흡수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타이탄이란, '거대하다'라는
의미 이외에도 '지나가 버린 과거의 것' 혹은 '구세대' 혹은 '구시대' 등등의 파생적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겠다. 아닌게아니라 타이탄은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영국 등의 노대국(老大國)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렇게 봤을 때 타이태닉 호의 이름은 그 자체가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즉, 타이탄족처럼 거대하고 강력했던 타이태닉 호는, 그러나 올림포스의 신진 세력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쫓겨난
타이탄족의 운명처럼, 또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몰락한 노대국 영국과 구유럽 세계의 운명처럼 결국 침몰하여 사라져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 뒤 세계 질서는 역사가 말해 주고 있듯이 미국이라는
이름의 올림포스 신들에 의해 새롭게 재편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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