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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urn of the Father/ Rehabilitation of the Father
좌파 진영이 <스타워즈>에 가한 비판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가부장적 아버지의 복권'이라는 문제다. 이는 특히 2부 <제국의 역습 The empire strikes back>(1980)에서부터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는 영화 텍스트상의 소재-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 베이더와 오비완 케노비 간의 삼각 관계-와도 비교적 명쾌하게 연결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어느 모로 보나 <스타워즈>는 히치콕(Alfred Hitchcock, 1899-1980)의 <사이코 Psycho>(1960) 이후 영화의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위축된 아버지의 역할과 비중을 신화적 양식을 빌어 단숨에 만회시키고
있는 영화이다. 실제로 <스타워즈> 3부작 어디에서도 어머니와 관련된 얘기는 찾아볼 수가 없으니까. 모든 심리적 갈등은 오로지 루크와 그의 아버지 다스 베이더를 축으로 해서만 발생하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숱한 할리우드 영화들 중 이 영화만큼이나 아버지라는 존재가 아들의 심리적 갈등의 주요인으로 등장하는 영화를 찾아보기도 힘들다.
사실 <사이코>는 히치콕이라는 인물의 걸출함과 더불어 대단한 흡인력을 발휘한 영화였다. 그 결과, <사이코>는
이 영화가 도입한 정신 분석학 지식의 통속적 담론화에 기여함으로써 우리에게 정신 분석학에 대한 상당히 부정적인 유산을 남겨 주었다. 이 유산은 대략 다음의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정신 질환자와 범죄자/살인자를 등식 관계로 처리해 버리는 못돼먹은 수법의 일반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만약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가 듣는다면 펄쩍 뛸 정도로
가족 내에서 유독 모자(母子) 관계의 중요성만을 우리에게 깊숙히 각인시켜 줌으로써 근친상간과 관련하여 이른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Oedipus Complex)'에 대한 광범위한 오해를 퍼뜨렸다는 점이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두번째 유산, 즉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오해에 관한 것이다. 물론 정신 분석학에서도 모자 관계의 중요성을 언급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 모자 관계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전부는 결코 아니며, 또 그렇다고 근친상간이라는 민감한 어휘가 곧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임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기(期)는 인간의 정신성적(psychosexual) 발달
단계 중 소위 남근기(Phallic phase, 3-5세)에 자연스럽게 거치게 되는 한 과정-비록 지금은 많은 식자(識者)들에 의해 부정되고 있지만-일 따름이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모자간 근친상간과
관련된 병적인 현상이 아니며, 이 시기에 자식은 아들이든 딸이든 어머니 못지 않게 아버지로부터도 영향을 받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시기를 잘 극복하지 못하여 발생하는 성적(性的) 아이덴티티 확립의
실패이다. <사이코> 전통의 문제점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모자 관계를 등식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기 고착에 의한 신경증(Neurosis), 나아가 정신증(Psychosis) 발현의 근저에는 한결같이
병적이고 왜곡된 모자 관계가 도사리고 있다는 식의 사고 방식을 대중화시켰다는 데에 있다. 옴니버스 영화 <뉴욕 스토리 New York Stories>(1989)에서 우디 알렌(Woody Allen, 1935- )이 감독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편에 나타나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희화화된 모습을 상기하라.
그런데, <사이코>에서 볼 수 있는 모자 관계는 어느 모로 보나 일반화시키기에는 부적당한 특수 상황이라는 것이 금방 드러난다. 그러니까 <사이코>의 주인공 노먼 베이츠는 외아들에다가
아버지 없이 성장했다는 특수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먼의 출생 성분이 그와 그의 어머니 사이에 형성된 왜곡된 모자 관계, 즉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 관계를 정당화해 주는 배경이 되고 있다. 이를 정신
분석학에서는 '오이디푸스적 승리(Oedipal triumph)'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오이디푸스적 승리란, "아이가 이성의 부모로부터 대단한 사랑과 관심의 초점이 되면서 한편으로는 동성의 부모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상황"을 말한다. 이 상황은 "어머니가 가족의 주도권을 잡고서 아들을 추켜세우는 반면 남편의 남성다움을 깔아뭉개"거나, 혹은 "소아기 동안에 동성의 부모가 사망하는" 경우에 발생한다고 한다.
노먼의 경우 5세 때(바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기임) 아버지가 사망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으므로 그의 오이디푸스적 승리는 결국 후자의 경우에 의한 쟁취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다.
재미있게도 이후 히치콕의 영화에서 이러한 <사이코>식 설정은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새 The Birds>(1963)나 <마니 Marnie>(1964)같은 영화에서 그 변형된 모습을 곧 발견해 낼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노먼 베이츠/아버지 없이 자란 외아들'이라는 일종의 코드가 <사이코> 이후 영화의 역사에
계속해서 발화(發話)되고 있다는 점이다. 피터 잭슨(Peter Jackson, 1961- )의 <데드 얼라이브 Dead Alive>(1992)는 아마 근래에 나온 영화들 중 이 코드의 가장 악랄하고 가장 흉측스런 발전물/변종에 해당될 것이다. 앨런
파커(Alan Parker, 1944- )의 <핑크 플로이드의 벽 Pink Floyd: The Wall>(1982)의 경우는 노먼 베이츠 코드가 심각한 양상으로 변형되어 나타나는 특이한 예인데, 코드의 의미가 주인공인 핑크 개인으로부터 사회
전반으로까지 확장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스타워즈>의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 역시 이 코드의 연장선상에 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비록 루크에게 쌍동이 누이-레이아 공주-가 있기는
하지만, 그가 이 사실을 모른 채 성장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것. 그리고 루크가 편모 슬하에서 성장했는지의 여부는 영화상에서 확인할 길이 없지만, 어쨌든 그가 적어도 아버지 없이 성장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그런데, 이 코드는 역설적이게도 정상적인 가부장제 가정의 회복에 대한 강력한 희구로 읽혀질 수도 있다는 이중성을 내포한다. 그것은 이 코드가 한편으로는 결손에서 비롯된 불균형을 암시하고도
있기 때문이다. 지속되고 있는 할리우드의 보수적 성향은 이 코드를, 결손 → 불균형 → 비정상 → 나쁜 것 → 악(惡)으로 발전시켜 독해하게끔 유도하고 있으며, 따라서 할리우드가 제시하는 치유책은 당연하게도
정상으로의 회귀-강한 가부장적 아버지의 복권일 수밖에 없다. 작년(1996년)에 개봉한 얀 드봉(Jan de Bont, 1943- )의 <트위스터 Twister>(1996)를 보라. 강력한 아버지는 복귀 중에 있다. 근래 비디오 테이프로 출시된 론
하워드(Ron Howard, 1954- )의 <랜섬 Ransom>(1996)을 보라. 돌아온 아버지는 이미 복권 중에 있다. 그리고 이제 조지 루카스의 97년판 <스타워즈> 3부작을 보라. 아버지는 어느새 복권하였다!
이야기의 초점을 다시 <스타워즈>에 맞추기로 하자.
주인공 루크는 사실 그의 친부인 다스 베이더만큼이나 양면적인 성향을 갖추고 있는 인물이다. 다른 말로 바꿔 얘기하자면, 결국 루크는 다스 베이더와 동질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즉, 아버지의
제다이 기사로서의 선하고 정의로운 면과 다스 베이더로서의 권력 지향적인 악한 면을 동시에 물려받았다는 얘기다. 과연 그는 제국 변방에 위치한 황량한 사막 행성 타투인의 농사꾼으로 만족하지 못한 채
아버지처럼 권력을 동경-지배 계급으로 상승하고 싶다는-하다가 바로 자신의 특이한 혈통에서 기인한 엘리트주의-포스(force)는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유전되는 것이며, 강력한
포스의 소유자가 곧 제다이 기사의 전제 조건이라는-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제다이 기사의 지위를 획득함으로써 자신의 권력 지향적 욕구를 보상받는다. 그러나 바로 이 욕구로 인해 그는 아버지가 겪었던
것과 동일한 메카니즘에 근거한 악의 유혹을 받는다. 그러니까 악당 다스 베이더가 아들, 그것도 정의의 제다이 기사인 아들에게 자기와 같이 이 은하계를 지배하자는 제의/유혹(이는 혈통에서
기인한 엘리트주의로도 부족하여 계급적 세습주의까지 가미하여 정당화시키고자 하는 지극히 반동적인(?!) 제의이다)을 하면서 이는 "너의 운명(your destiny)"이라는 엄숙한 선언을 서슴지 않았던 것도
기실 따지고 보면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애당초 이렇게 설정된 부자 관계로 인하여 다스 베이더의 제국과 루크 스카이워커의 공화파 반란군은 성격상 동일선상에 놓여 버리고 만다. 어쨌든 제국 역시 한때는 공화국에 대한 반란군이자 혁명
세력이었으며, 현재의 반란군 역시 과거에는 반란과 혁명에 저항하는 수구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타워즈>에서 전체주의 대 개인주의의 대결이라는 가치 판단적 도식만 살짝 들어내고 나면 남는 것은 두
권력 지향 집단의 폭력 대결 밖에는 없다. 여러 평자들이 계속해서 지적하고 있는 바이지만, <스타워즈> 1부의 라스트 시퀀스에서 볼 수 있는 반란군의 훈장 수여식 광경이 친나치주의자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의 다큐멘터리 <의지의 승리 Triumph des Willens>(1935)에 나오는 나치의 뉘른베르크 전당 대회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는 사실은 결국 제국과 공화파 반란군이 동일한 원리 위에 서 있다는 관점을
재확인시켜 준다.
이상과 같은 이율배반들로 인하여 <스타워즈>는 좌파 진영으로부터 엘리트주의와 계급 구조의 고착과 파시즘적 폭력과 구질서의 회복과 보수 반동을 옹호하는 영화라는 매몰찬 비판을 듣고 있는
것이다. 한낱 중세 기사담과 영웅 신화를 끌어온 데 지나지 않은 팬터지 영화에 대한 비판치곤 너무 심각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과 회의가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비판의 강도가 높다는 사실은 그만큼 <스타워즈>가
이 시대를 지배하는 강력한 문화적 코드의 하나라는 점을 반영하고 있음을 의미할 따름이다.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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