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cellany
 on CINEMA <웹진영화>의 성격과 노선에 대하여 - 1/2  
<웹진영화>의 성격과 노선에 대하여
관객 선언 - 영화 평론가는 죽어야 하는가?

이 글은 1997년 8월, 웹진영화 제2호 BRAINSTORM 섹션에 위와 동일한 제목으로 실었던 것이다. 2000/07/22.

1. 지난 1호에서 우리는 '영화 평론가의 죽음'을 선언했다. 이 선언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이 선언이 일부 사람들에겐 적잖은 거부감을 불러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어떤 분은 우리에게 "영화 평론가들이 죽어야 하는 논거를 제시하라"는 강경한 요구까지 해왔다.

하긴 선언문은 선언문으로서 갖추어야 할 형식과 선동적인 간결함으로 인해 구체적인 설명이 배제된다는 점에서 이런저런 오해를 받을 여지가 충분하다. 우리는 우리의 선언 때문에 곧 오해에 직면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오해와 거부 반응에 맞부딪치고 보니 뭔가 서글픈 생각이 앞서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평론가는 죽었다"라는 문구의 수사학적 의미를 완전히 무시한 채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는 일부 사람들의 정서적 삭막함과 여유 없음에 대해 깊은 유감과 우려를 표하는 바이다. 무엇이든 직설적으로 그리고 과격하게 표현하고 내뱉고 배설해야 겨우 주장이 먹혀 들어가는 전근대적 시기를 거쳐오는 동안 우리는 어느새 토론보다는 시비 걸기와 상대 제압하기에 익숙해져 버린 게 아닐까? 권력과 권위를 혼동하고 이 둘을 모두 물리적 힘과 폭력의 행사로 환원시켜 버리는 단순 논리에 물들어 있는 우리 사회에, 권력의 은밀한 개입을 지적한 푸코(M. Foucault, 1926-1984) 철학의 도입은 아무래도 시기상조였던 것 같다. 199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푸코의 1960년대 식 사고는 여전히 정신적 사치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2. 정작 영화 평론가(이하 영평가) 본인들은 설사 '우리의 선언-그들의 죽음'을 접했다 하더라도 별 유감을 표명할 것 같지가 않다. 재미있다고 생각하든가 코웃음을 치든가 그냥 무시해 버리든가 혹은 의욕만 앞세운 철없는 애들(물론 우리는 철없는 애들이 아니다)의 치기 어린 산물이라고 혀를 차든가는 할지언정 우리의 선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심각하게 자살 여부를 고민하는 위인은 아마 영평가 중에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선언에 '비분강개'해 하는 위인이 있다면 그는 영평가 본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주변을 배회하는 인물들, 즉 영평가 지망자이든가 전문 영평 작업에 매료된 사람이든가 영평가와 개인적 친분이 있는 사람이든가 특정 영평가를 존경 또는 좋아하는 사람이든가 혹은 나아가 영화로 밥벌이하는 사람이든가 영화로 밥벌이를 하려는 사람일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저 온라인상에서나 소모적 시비 걸기를 통해 무한한 쾌감을 느끼는 '온라인 매개성 언투(言鬪) 애호증' 환자든가 아니면 무엇이든 일단 개똥 취급하고 보는 '선천성 오만 과잉 증후군' 환자든가 아니면 뭔가 권력에 대한 무한한 욕망에 압도당하고 있으나 이를 충족시키지 못해 열등감과 분노에 시달리고 있는 '높은 의자 폭군 증후군' 환자이든가….


3. 우리는 <웹진영화>를 창간한 이래 지금까지 우리의 선언에 대한 어떠한 논리적 반박도 접해 보지 못했다. 직접 대면할 수 없다는 네트(NET)의 생리를 이용한 몇몇 폭력배들의 한심한 언어 테러와 스스로 논리적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의 어설픈 반론을 몇 편 접했을 따름이다. 왜 우리의 선언은 아무 부담 없이 쿡 쑤셔볼 수 있는 만만한 상대의 잡소리로만 취급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런저런 점들을 감안해 볼 때 그 이유는 결국 다음의 하나로 모아질 수밖에 없다. 즉, 우리가 애당초 '관객'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것.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기와 다를 바 없는 관객들이 모여 만든 웹진이니 얼마나 만만하게 보였을 것인가?

관객에게는 절대로 권력이 주어지지 않는다. 관객은 항상 공급자의 논리와 홍보 전략의 장단에 맞춰 놀아나는 조작의 대상이자 수동적인 관람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관객의 입장을 변호하고 관객의 파워를 강조하는 교묘한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하더라도 관객은 그저 관객일 따름이다. 관객은 자기가 볼 영화를 선택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애석하게도 우리는 이 선택마저도 자유로울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영화라는 한 세계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숱한 담론의 영역에서 창조적 생산자로서의 발언권을 얻을 수는 없다. 창조하고 생산하고 발언한다는 것은 결국 권력의 또 다른 양태이기 때문이다.

영화에 관한 한 아무 권력도 주어져 있지 않은 관객은 제아무리 목소리를 드높여 자기의 권리를 주장한다 하더라도 종국엔 무시당할 수밖에 없다. <웹진영화>는 이러한 관객 무시의 관행화에 대한 하나의 저항이다. 즉, 관객으로서의 정체성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창조적 생산자로서의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 다시 말해서 관객의 권력 행위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와 노력이 우리의 선언-영평가의 죽음이라는 문구에 상징적으로 집약돼 있다. 우리가 굳이 영평가를 구체적 대상으로 명기한 이유는, 영평가들의 사고와 노선이 관객의 사고와 주장을 대신하고 나아가 관객의 사고를 그들의 것에 종속시켜 버린다는 점에서 영평가의 평론 행위는 계몽 작업이기 이전에 그 자체로서 관객의 자유로운 시선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제약이자 그 무엇과도 비길 데 없는 거대한 제도적 벽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다행히 우리의 시도와 노력이 결실을 맺어 <웹진영화>가 관객 운동으로서 하나의 권위를 갖추게 된다면 우리는 관객이라는 이름을 빙자하여 우리를 공격했거나 공격할 수많은 허접쓰레기들의 적대적인 감정 배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창조적이기를 바라는 소수의 관객들과 진지한 연대를 모색함으로써 영평가로 상징되는 지배 권력의 획일화 경향에 대한 저항을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현재 우리는 관객들의 다양한 시선을 제시하기 위해 뜻 있고 필력 있는 관객/필진의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 중 뜻 있는 분들의 동참을 진심으로 바라 마지않는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지만, 권력은 이제 이 사회에서 수많은 구심점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개개의 구심점들이 권위를 갖춘 구심점으로 성장할 것인가의 여부는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권력이라고 해서 다 같은 권력이 아니질 않은가?


4. 앞서 어떤 분이 우리에게 "영화 평론가들이 죽어야 하는 논거를 제시하라"는 강경한 요구를 해 왔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이 분은 정확히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의 선언이 아주 못마땅하게 여겨졌던 것 같다. 그나마 이 분이 감정 배설에만 머물지 않고 나름의 논리로 우리에게 반박문을 보내 오신 점만큼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분이 왜 하필 작년에 있었던 이정하 님(이하 존칭 생략)의 절필 사건을 우리의 선언과 결부시키려 했는지 우리로선 사실 납득하기가 어렵다. 이정하의 죽음을 보고도 '영평가는 죽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느냐는 그의 우리를 향한 분노는 "더 이상 그들(영평가)의 죽음을 묵과할 수 없다"는 결의에 가득 찬 주장으로 이어진다. 글쎄… 이 분은 뭔가 잘못 알고 있던가 아니면 예를 잘못 선택하신 것 같다.

사건의 전모를 지켜 본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수긍할 거라 믿지만, 이정하 절필 선언의 직접적 원인은 바로 이정하 자신에게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죽음' 운운의 얘기를 먼저 꺼낸 사람은 다름 아닌 이정하 자신이었으니까. 게다가 이정하의 평론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우리로선 당연한 일이겠으되 이정하는 그즈음 어차피 평론 활동을 그만 둘 계획으로 있었다. 좀 과격하게 유추해 보자면, 이정하는 자신의 평론 활동-영화를 평가하는 능력에 자신을 잃었고, 그래서 회의를 느꼈던 탓에 평론 활동을 그만 둘 결심을 하게 됐던 것은 아닐까? 여기에다 휘발유를 끼얹은 것이, '감독의 죽음'을 언급한 이정하의 한 평론에 발끈하여 그 수사학적 의미를 독해할 성의마저 보이지 않은 채 어설픈 항의와 무언의 '이지메'나 가하기에 바빴던 일부 감독들의 행태였다. 그러니까 이정하의 절필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고, 일부 감독들의 비난이 그 시기를 앞당기는 촉매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정하의 절필 사건-이정하의 죽음은, 이정하 본인의 의사가 어떠했든 이와는 상관없이, 그간 한국 영화계 내부에 누적돼 왔던 각종 문제들이 그의 한 평론을 계기로 표면에 잠깐 그 총체적 모습을 드러냈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이정하의 절필 선언으로 조기 종결되지 않고 계속 이어졌더라면 아마 아직까지도 미분화 상태에 처해 있는 영화계 내부의 영토 분쟁-밥그릇 싸움으로까지 번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달리 얘기해서 한국의 학문적-문화적 후진성이 그 실체를 여지없이 노출당할 수도 있었던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이정하의 죽음은 우리/관객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5. 우리의 영평가들이 유형, 무형의 권력은 지니고 있되 권위까지 갖추고 있지는 못하다는 점에 대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앞에 언급한 이정하의 절필 사건이 바로 이 점을 집약하여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만약 우리 영평가들의 평론이 평소 권위를 갖고 있었다면 감독들이 그토록이나 반발했겠는가? 이정하 사건으로 새삼 재확인된 바이지만, 우리의 감독들은 우리 영평가들의 평론 활동에 그다지 신뢰의 눈길을 안 보내고 있는 듯하다. 우리 역시 그러하다. 무엇보다도 우리 영평가들에게 그들만의 독자적 시선과 방법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권위를 쉬이 인정할 수 없게끔 만드는데 한몫 하고 있다. 사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하나같이 외국의 것을 차용한 것들 아니던가? 우리 학문의 외국 종속 경향은 특히나 학제적(學際的, interdisciplinary) 성격이 강한 영화학 분야에서도 결코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 학제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은 바꿔 얘기하면 적어도 영화에 있어서만큼은 전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우리 사회가 문화적으로 다양해지면서 영화에 대한 비평 작업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또 이런 이유로 영평가 역시 제도적 등용문을 통과해야 자격을 인정받는 시기가 도래했다. 즉, 영화 평론의 전문화 내지는 영화 평론의 직업화가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필시 영평가의 전문직화로 이어질 것임이 명약관화하다. 그런데, 이러한 전문직화 추세가 과연 바람직한 것이며, 또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에 대해선 강한 의문의 여지가 남는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그 속성상 대중 지향적이어서 어떤 자격을 취득한 자들만이 모여 전문적인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게토'적 성격의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 누구라도 영화에 대해 얘기할 수 있으며, 그 누구라도 영화평을 쓸 수 있으며, 그 누구라도 영화를 감독할 수 있으며, 그 누구라도 영화를 제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록 그룹 '도어스 The Doors'의 리드 싱어 짐 모리슨(Jim Morrison, 1943-1971)의 영화에 대한 다음의 견해는 비록 발언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경청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참고로, 모리슨은 일세를 풍미한 대중 스타의 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한때 UCLA 영화학과에 적을 두고 진지하게 영화 수업을 받던 학생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그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의 영화 관객이었다는 점이다].

"영화가 좋은 것은 전문가가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영화에는 아무런 권위도 필요 없다. 누구라도 영화의 역사 전체를 자신의 내부에 동화시켜 간직할 수 있는데 다른 예술에서는 이런 일이 불가능하다. 전문가는 전혀 없으며 따라서 이론적으로 보자면 어떤 학생도 어떤 교수만큼은 영화에 대해 알고 있는 셈이다." [J. 홉킨스, D. 슈거맨(공저)(1980), <여기서는 아무도 살아 나가지 못한다 No one here gets out alive>, 조형준(역)(서울: 청담사, 1992), 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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