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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실 영평가의 전문직화는 지금까지 흔히 전문직의 특징이라고 알려져 온 것들에 의거해 볼 때에도 어떤 식으로든 그 정당성을 인정받기가 힘들다.
전문직이란, 첫째, 특수한 지식과 오랜 교육 기간이 필요하며, 둘째, 일반인은 전문가의 전문 지식에 의존하게 되기 때문에 전문인은 고객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타성을 갖추어야 하며, 셋째,
비전문인이 전문인의 직무를 수행하면 불법이 되므로 업무의 독점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넷째, 전문인만이 동료 전문인의 업무 능력을 평가할 수 있으므로 자체 감독권을 가지며 그런 의미에서 자율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영평가의 영화 평론 행위는 그 생리상 이상의 네 가지 특징 중 어떠한 것에도 부합되지 않는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영화학 분야 자체가 강한 학제적 성격을 띠는 데다가 영화라는 문화 자체가
대중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한 학제적 성격을 띤다 함은 곧 다른 어느 학문 분야의 전문가라도 영화 평론이나 영화 이론 연구에 깊숙히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대중 지향적이라 함은 그 누구라도
특수 지식 없이 영화에 접근할 수 있고 따라서 굳이 전문가의 영화평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영화가 놀이 문화라는 점은 영평가의 전문직화에 가장 큰 저해 요인으로 작용한다. 세상에!
노는 데도 전문가의 조언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한국에서 영평가의 전문직화가 특별한 난관에 부딪힘 없이 착실하게 진행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영역을 확보함으로써 권력과 이익을 획득하기 위한 사회적 헤게모니 싸움에서 영평가들의
전략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슨 음흉한 음모론의 냄새를 풍기기는 하지만, 몇몇 사회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통해서도 밝혀졌듯이 전문직이란 어느 정도는 "사회·정치적 투쟁의
산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문직이란 "역사적으로 특정한 사회·정치적 과정의 결과로 형성"된 것이지 사회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요청에 의해 대두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전문직은 "집단적인 이타성보다는 자기 이해를 강화하는" 속성이 강하며, 따라서 "자신의 직무에 합법적인 독점권을 확보"함으로써 외부인이 자신의 영역에 접근하는
것을 엄격히 제한하는 이른바 폐쇄 전략을 구사한다. 영평가라는 자격 조건을 부여하기 위해 생긴 등용문 코스는 바로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영화 자신을 위해서라도 영평가의 전문직화에 의한 지식의 독점과 권력의 체계적 제도화를 진심으로 원치 않는 바이다. 다른 예술 분야들처럼 영화에도 비평 작업이 필요하다는 걸 인정하지만,
그것이 특정 집단에 의해 지배되고 통제되고 나아가 신성시되는 경향에 반대하겠다는 것이다.
- [S. 네틀턴(저)(1995), <건강과 질병의 사회학 The sociology of health & illness>, 조효제(역)(서울: 한울, 1997), 60-63쪽, 248-252쪽 참조]
7. 물론, 우리는 매체 취급도 받지 못하던 영화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고민하고 애쓰고 (미처 몰랐던 사실이지만) 삭발까지 감행했다는 현재의 30-40대
영평가들의 노고마저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한국의 영화 인플레이션 현상이 순전히 그들의 노력만으로 이룩된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건 착각도 이만저만한 착각이 아니다. 꼭
마르크스주의적 발상에 의거하지 않더라도 문화-영화도 문화의 일종이라고 본다면-가 전개되고 발전하기 위해선 그 문화의 전개 정도에 상응하는 물적 토대가 구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30-40대 영평가들이 이만큼이라도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그들의 노고도 노고지만, 그들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우연성/행운 역시 간과할 수 없다는 얘기다.
사실 알고 보면 이들 30-40대 영평가들도 애초 영화가 좋다는 이유/열정 하나만으로 영화판에 뛰어든 게 아니던가? 이들의 상당수가 서울 주재 유럽 각국 문화원(그래 봤댔자 프랑스
문화원과 서독 문화원이 고작이었겠지만)을 열심히 들락거리던 영화광 시절을 거쳐 영평가 집단을 형성했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들이 만약 10년 일찍 태어났거나 혹은 10년 늦게
태어났더라면 과연 지금과 같은 지위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인가? 아마 10년 정도 일찍 태어났더라면 모르면 모르되 고(故) 하길종 감독 같은 식의 한계 상황에 부딪쳤을 공산이 크며, 10년 정도 늦게 태어났더라면 잘난
영평가 선배들의 후광에 가려 빛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여튼, 이제 이러한 소수의 영화광에 의해 영화가 독점되던 시기는 지났다. 고(故) 정영일 아저씨 같은 분에 의해 관객이 계몽되던 시기 또한 예전에
지나갔고…. 관객은 관심과 결심만 있으면 어디서든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영화는 결국 다수 관객-대중이라는 속성을 벗어날 수 없긴 하지만-의 것이다.
물론 이런 건 있다. 즉, 관객은 관객인 이상 그가 아무리 영화에 박식하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아마추어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 우리 또한 애당초 스스로를 관객으로 규정지었고 보면
관객으로서의 아마추어리즘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기는 힘들다. 우리가 이 한계를 감수하면서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면은 딱 하나, 어떠한 제도적 구속에도 얽매이지 않고 어떠한 이해 관계의 연결 고리에도
연루되지 않은 채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다는 것.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곧 영화의 유희적 성격과 연결된다. 그러니까 <웹진영화>의 창간은 어떤 의미에선 영화보기의 즐거움을 글로써 연장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는 것이다. 즉, 그 즐거움을 다른 여러 관객/독자들과 나누고 싶다는 욕구. 그렇다고 우리가 이 아마추어리즘의 유희 뒤에 숨어 비겁하게 면책 특권이나 바랄 생각은 전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실수에 대해
얼마든지 달게 지적받을 용의가 있는 것이다. 다만 그 지적이 감정 배설 뒤에 남는 찌꺼기의 형태를 띠지 않기만을 바랄 뿐.
8. 우리의 당돌한 선언-영평가의 죽음에 대해 어떤 분들은 다음과 같은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영평가의 죽음을 주장한다지만, 너희들의 글 쓰는
방식이나 영화를 보는 시선이 영평가들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도 없고 보면 너희들은 그저 영평가 흉내내기에나 급급한 어설픈 논객 무리일 뿐이지 너희들의 관객 선언은 아무런 설득력도 지니지 못한다"라는
것. 실제로도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미 이러한 반응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오해는 평자와 관객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아주 단순한 이분법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나아가 어떤 분야에 대해서든
학문적 접근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평자와 관객을 철저히 구분하는 단순 이분법은 관객을 영원히 정신적 유아의 상태에 고착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에 따르면 영평가는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자요, 관객은 어디까지나 그
수혜자(受惠者)로서 영평가의 은혜에 감지덕지하는 처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관객은 언제까지고 "우와! 이 영화 넘 재밌어요~ 꼭들 보세여~" 따위의 유치한 감탄사나 연발하면서 객석을 메꾸는
구경꾼으로 만족하고 있으라는 얘긴가? 관객은 그저 영화를 감성적으로 느끼고 즐기기만 하면 그만인가? 관객은 그저 영화에 전이나 일으키고, 퇴행 혹은 투사를 통해 자기 도취적 동일시에나 빠져드는 몽상가
취급이나 받아야 한다는 것인가? 관객이라 해서 이성적 비평 행위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관객이라 해서 영평가만큼 진지하게 영화를 독해해서는 안 된다는 법도 없다. 관객이라 해서 언제까지나 영평가의 비평
작업에 의지하여 영화를 봐야 한다는 법도 또한 없다. 관객은 그 누구나 영화를 소유할 권리가 있고, 그 소유권를 비평/글쓰기 작업으로써 표현/주장할 권리 또한 갖고 있다.
일부 사람들(물론 관객 자신들이다)은 이러한 우리의 주장에 대해 강한 반발을 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관객의 비평이란 영평가들의 그것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솔직
담백하게 자기의 느낌을 피력하는 감상문 혹은 수필 차원에 한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기에 이는 관객의 주관적 시선을 확보한다는 미명 하에 스스로에게 형식의 굴레를 덮어씌우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시각이다. 나아가 언어와 학문의 상관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통찰력이 결여돼 있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단견(短見)이기도 하다. 어떤 분야든 거기에서만 통용되는 언어, 즉 전문 용어라는 것이 있으며, 어떤
분야든 그 분야에서 전제로 깔고 있는 개념과 지식들이 있게 마련이다. 대학에서 수학 기간 내내 배우는 것이 바로 이런 것들 아닌가? 그러니까 대학에서 전공 분야를 공부한다는 것은 바로 그 분야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개념을 습득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분야 또한 다른 여러 분야에서 차용한 무수한 언어와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영화를 그저 피상적으로 보고 즐기는 데에만
그치려는 게 아닌 이상, 영화에서 통용되는 언어와 개념의 습득은 필연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관객인 우리뿐만 아니라 영평가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칙이다. 따라서 혹시라도 우리의 글 내용이나 접근
방식이 영평가들의 그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사용하는 언어와 개념이 동일하니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닌가? 물론 이들 언어와 개념은 우리의 사고를 담기 위한 일종의 '도구'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것이 사고의 자유를 구속하는 또 다른 장애물로 변할 경우 우리는 언제든 이를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다.
9. <웹진영화> 창간호를 보신 분들은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영화와 관련된 글이라면 우리는 글쓰기에 관한 한 어떠한 형식적 굴레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필자
마음이다. 필자가 무얼 어떤 식으로 써 갈기든 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필진의 이러한 자유로운 글쓰기를 통해 관객의 다양한 시선을 제시하고자 한다. 즉, 영화에 대한 접근 방식에 있어서 어떠한
절대적 기준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어떠한 객관적 해법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 어떠한 해법도 절대 우위를 차지할 수 없음을 우리는 밝히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우리는 명화의 전당에 모셔져 있는 영화들 중 어떤 것은 사정없이 강등시켜 버릴 수도 있을 것이며, 역으로 그간 영평가들의 권력 행위에 의해 쓰레기로 분류된 무수한 영화들
중에서 가치 있는 영화를 발견하여 구제해 내는 수확을 거둘 수도 있을 것으로 믿는다.
10. 우리는 관객이다! 우리는 영평가의 죽음을 다시 한 번 더 선언하는 바이다. 물론 이 선언이 실제로 영평가들의 몰살을 바라는 철없는 아이들의 치기 어린 주장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기 바란다. 우리에게 있어서 영평가들의 시선은 어디까지나 참고 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관객의 시선을 봉쇄하는 벽이자 지배자로서의 권력이 되는 것을 경계한다.
혹 <웹진영화>의 창간 자체가 기존의 권력에 도전하여 또 다른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시도가 결코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우리가 관객임을 천명한 이상 <웹진영화>는 앞으로도 관객 시선의 확보를 위한 저항 공간으로 계속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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