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cellany
 on LITERATURE P 군에게...  1/2  
P 군에게 - 소설 <페스트>를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들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은 내가 군에서 일등병으로 복무하던 무렵인 1994년 3월, 부대 내 교회지 <삶> 창간호에 싣기 위해 쓴 것이다. 야간 경계 근무가 없는 운 좋은 날에만 밤잠 1시간씩 줄여가며 병영 내(內) 공부방에서 써 내려간 글이다. 부대가 서울 이북에 위치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항상 불안 속에서 시간을 보냈던 그 시절, 나는 자연스럽게 실존주의 철학에 경도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글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군 시절 나는 언제나 맹렬한 지적 욕구에 허기져 있었다. 항상 뭔가에 쫓기는 듯한 다급한 심정과 초조함과 억울함과 분노와 허무와 자괴감이 이러한 허기를 더더욱 증폭시켰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전역 전까지는 절대로 충족될 수 없는 탄탈로스의 갈증과도 같은 그런 것이었다.

1994년 봄, 전방은 "서울은 불바다가 된다"는 북측의 협박에 초긴장 상태였다. 지금에서야 당시 한반도가 미국에 의해 거의 전쟁 일보직전으로까지 몰려갔던 아주 긴박한 상황이었다는 사실이 차례차례 밝혀지고 있지만, 일개 육군 일병이었던 필자는 그런 자세한 사정까지야 알 수 없었다. 다만, 매일 새벽 경계 근무 설 때마다 안개가 자욱히 깔린 도로를 따라 전차들이 굉음을 울리며 북상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전쟁이 터질 수도 있으니 집에 유서를 겸한 편지를 미리 보내 두라는 어느 일직 사관의 훈시를 들으면서 이제 머잖아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막연한 생각에 사로잡혔을 뿐이다. '막연한'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설마 정말로 전쟁이야 발발하겠느냐'라는 기묘한 기대감 같은 것이 당시 더 지배적인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아래의 글은 이러한 기대감과 절박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쓰여진 일종의 유서다. 다행히 1994년은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해, 나는 전역했다.

이 글은 미완성품이다. 원래 2장까지 쓸 예정이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결국 여기 싣는 1장으로 끝나 버렸다. 제목에 등장하는 P 군은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 친구였다. 그러나 사람과의 관계란 건 그 얼마나 나약한 감정의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이던가. P 군은 이제 과거의 사람이 돼 버렸다. 이 글은 따라서 그와의 빛 바랜 우정에 대한 마지막 회고일 수도 있으리라. 2000/08/03.


1. 부조리와 지식인과 회의주의, 휴머니즘, 그리고 인간

P. 요즘은 "서울은 불바다…" 운운의 말도 들리고 해서 부쩍 '부조리'라는 단어에 집착하게 된다네. 비록 우리의 현실이 언제고 전쟁이 발발할 것을 예상하고 있어야만 하는 휴전 상태이지만, 이 상태가 40여 년이나 지속되다 보니 우리의 의식 속에는 -실제로 나 자신이 군인이라는 신분에 속해 있음에도- 언제부턴가 전쟁이라는 단어가 일종의 박제화된 것, 말하자면 TV 뉴스에서나 보는 먼 나라 얘기로만 느껴지게 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 않겠나? 전쟁이라는 것에 대해 의식조차 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이는 마치 인간이 죽음이라는 생리 현상을 향해 질주해 가면서도 전혀 죽음을 의식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겠지만- 우리의 일상에 침입하여 그 단조로움을 순식간에 해체시켜 버리는, 우리의 익숙한 삶을 별안간 무너뜨려 버리는 도대체 '어처구니없는' 사건인 전쟁은 '부조리한 것이다'라는 표현 외엔 적당한 표현을 찾을 수가 없군.

아무튼, 부조리라는 단어를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레 이 말을 자기 철학의 중심 테마로 삼았던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가 생각나는군. 전쟁과도 같이 오랑시(市) 주민들의 일상을 엄습하여 주민들을 고통에 빠뜨리는 페스트는 현실 세계에 곧잘 나타나는 부조리의 상징적 표현에 다름 아니겠지. 그런데, 페스트에 대응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한 묘사가 흥미롭게 전개되는 이 소설에서 내 관심을 끈 등장 인물은 두 사람이었다네. 물론 카뮈 철학의 핵심인 '반항(부조리에 대한)'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이 반항의 형상화라고 볼 수 있는 주인공이자 내레이터인 의사 리유가 부각되는 게 사실이지만, 문학 작품을 대할 때의 개개 독자의 주관적 심미 체험이 중요하다는 걸 인정한다면 이제 내가 공감한 두 인물을 선택하여 논제로 삼는 데에 큰 무리는 없을 것으로 여겨지는군. 그 두 사람이란 다름 아닌 신부 파늘루와 시청 서기인 그랑이라네. 음… 그런데 자네 <페스트>를 읽어보긴 한 건가? 읽어보지 않았다면 글쎄… 난 허공에 대고 지껄이고 있는 꼴이 되어 버리는데. 여하간에 이 두 인물은 지극히 대조적인(대립적이 아니라) 성격을 갖고 있다네. 즉,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리유를 통해 카뮈가 가장 큰 적의를 드러낸 인물이 파늘루인 반면, 그랑은 작가의 또 다른 분신이면서 작가가 지극히 간접적인 방식으로 최고의 애정을 표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네. 이제 난 이 두 인물을 통해 천천히 내 사고의 실마리를 풀어 나가고자 하네.

우선 그랑이라는 인물을 통해 떠올랐던 생각들을 얘기해 보려 하네. 그랑은 프랑스인(카뮈도 프랑스인이지)들이 자신의 문화를 통해 친밀감을 보여주고 있는 예술가를 상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 비록 그랑은 소설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시청의 보조 서기라는 따분한 직책을 별 불평 없이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초라한 소시민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데다 돈 키호테 같이 우스꽝스런 야망(위대한 작가로 칭송받고자 하는)에 사로잡혀 퇴근 이후에는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원고 -이 역시 결국은 첫 문장을 완벽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무수히 뜯어고친 첫 문장만이 난무하는 원고 뭉치로 남게 되지만- 채워 나가기에 열중하는, 선량하기는 하나 코믹한 인물로 그려지고는 있지만, 어쨌거나 그는 희화화된 모습으로나마 하나의 이상(희망이라고 해도 좋겠지)을 간직한 예술가, 즉 카뮈의 또 다른 분신이라고 볼 수 있네. 예술가는 그 성격상 사회의 통념이 통하지 않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삶을 이끌어 간다는 관점에서 언젠가 자네가 프랑스 영화 <델리카트슨>을 분석해 준 기억이 문득 나는군. 예술가의 이러한 잠재적 기질은 사회 구조를 그 밑둥부터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위험 요소를 간직하고 있어 파시즘 하에서 예술가의 자유분방한 창조성과 이에서 파생된 독자성은 항상 억제당하게 마련이었지. 예술가로서의 그랑은 이러한 독자성과 이상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페스트(즉, 부조리)로 인해 폐쇄된 오랑시의 혼란스러운 상황(부조리한 세상)에서도 어떤 큰 동요 없이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작업을 계속 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네. 그가 페스트에 걸려 의사 리유로부터 사망 선고를 받았음에도 기적적으로 소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을 은유적으로 부각시켜 주고 있는 게 아닐까? 리유 역시 그랑의 이러한 면을 직감했기 때문에 이미 그랑을 만난 초기에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닐 듯한 지금의 페스트가 아니라 역사상의 어떤 대대적인 페스트 한복판에 있는 그랑"을 상상하면서 "그런 경우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야"라고 생각한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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