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가 만연한 혼란 가운데에서도 그랑처럼 냉정을 잃지 않은 채 어느 누구도 강요하거나 시킨 적 없는 일종의 자기 과업으로서의 글쓰기를 규칙적으로 계속 해 나아가는 데는 어느 정도의 강박 성향과 더불어 자신의 내면 세계에 깊이 침잠할 수 있는 내향성이 요구되네. 그랑에게서 내가 어떤 친밀감을 느꼈던 것은 아마도 내가 근본적으로 그랑과 동질의 인간(강박적이고 내향적이라는 의미에서)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네. 그러나 막상 지금 당장 전쟁(페스트와는 또 다른 부조리인)이 터진다면 아마 모르긴 해도 난 나에게 내재해 있는 또 다른 성향-일종의 허무주의와 소극적 방임주의-으로 인해 그랑과 같은 성실성을 보여 주기는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드네.

그러고 보니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군. 언젠가 TV에서 <홀로코스트>라는 미니 시리즈를 방영한 적이 있지. 이 드라마에 한 유태인 가장이 등장하는데 갑자기 이 사람이 생각나는군. 인텔리인 이 유태인은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의 야만성과 추악한 모습들, 그리고 문화가 파괴되어 가는 양상을 지켜보면서 말할 수 없는 회의에 사로잡혔던 것 같네. 따라서 그가 가족을 이끌고 피난 가는 중에 자기 아들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말(내 기억이 맞다면)을 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어. "나는 이런 상황이 싫다. 이런 현실에서 굳이 생존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다. 난 다만 이런 현실이 싫을 뿐이야." 힘없이 뇌까리는 말이었지만, 이 말의 이면에는 형용할 수조차 없는 분노가 숨겨져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어. 그러나 당시 10대 청소년이었던 아들은 아버지의 이러한 나약한 모습에 반발하고 나서서 나치 독일군에 대항하는 유격대 활동을 하며 악착같이 살아남지. 물론 아버지는 가스실의 이슬로 사라지지만…. 각설하고, 여하간 이 유태인 가장에게서 또한 친밀감을 느낀 것은 나 역시 이 유태인처럼 -이는 자네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지만- 숙명적으로 지식인임을 자처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

사르트르는 그랬어. "지식인은 고독하다"고. 왜냐면 "아무도 그에게 어떤 임무를 위임한 적이 없기 때문"이지. 하긴 지식인은 어떤 사회 계급일 수도, 계층일 수도 없거니와 지식인이라는 직업 내지 신분이 있는 것은 더더욱이나 아니지. 결국 지식인이란, 스스로를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방법 이외엔 자신을 드러낼 어떠한 방도도 없어. 이처럼 사회의 묵시적 합의조차 얻지 못한 지식인이 사회를 이끌어 나간다거나 나아가 혁명을 일으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네. 사회 통념상 많은 이들이 지식인이라 하면 뭐랄까 나약하거나 소극적이다라는 이미지를 연상하는 것 같아. 이러한 통념에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가는데, 이는 지식인임을 자처하는 여러 사람들(카뮈에게선 예외적인 면을 찾아볼 수 있지만-'반항'이라는 사상과 결부시켜 볼 때 말이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어떤 성향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 지식인에게는 내가 앞서 언급한 모든 심리 양상들 -강박성(그래서 양심적인-이는 단순히 선량하다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네); 내향성(이는 흔히 말하는 내성적이라는 말과는 차이가 있어. 내가 말하는 내향성이라는 말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선 카를 융의 성격 유형 학설을 알 필요가 있네); 허무주의; 소극적 방임주의- 이 죄다 적용된다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르시시즘을 빼놓을 수가 없지. 이러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진정한 지식인은 끝없이 절망하고 회의에 빠지면서도 언제나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 희망(앞서 언급한 예술가적 이상과 거의 일치하는)을 안고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지식인은 각자의 표출 방식이 다를 뿐이지 근본적으로 동일한 꿈을 품고 있는 셈이네. 지식인이 나약한 것처럼 보이는 진정한 이유는 아마도 지식인에게는 이러한 도달할 수 없는 꿈-희망-이상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있기 때문일 거야.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는 건 좋은 일임에 틀림없어. 아무리 고통스런 상황(곧, 부조리한 세계-페스트가 만연한 오랑시)에 처하더라도 희망을 버리지만 않는다면 그랑처럼 페스트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에 잠겨 보네. 내가 망상이라는 단어를 쓴 까닭은 나의 기본 입장이 자네도 알다시피 인간성에 대한 강한 불신감을 토로하고 있기 때문이며, 자네와 마찬가지로 자율적 이성을 갖는 완전한 독립체로서의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일찌감치 포기했기 때문이기도 하네. 이러한 전제 조건에서 출발한다면 인간은 의식 활동, 즉 이성을 통해서는 결단코 진리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성에 대한 신뢰 없이는 그 이성에 근거를 둔 인식 작용 역시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지. 결국 만사는 그저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회의론에 봉착해 버리고, 꿈-희망-이상은 도달할 길 없는 그야말로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에 빠져버릴 수 있어. 지식인이, 그리고 예술가가 끊임없이 좌절하는 데에는 이런 철학적 이유가 분명히 존재하네. 그럼에도 인간에게 이상이 이상으로서 가치를 갖는 것은, 적어도 휴머니즘 전통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을 지탱해 주는 기둥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이상-고대 그리스인들이 자기네 신화에서 '판도라의 상자'라는 매력적인 얘기로써 묘사하고 있는-이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 그래서 지식인, 특히 철학자들이 아직까지도 절대 진리에로의 도달(즉, 완전한 인식-'너희가 神처럼 되리라'는 원초적 유혹)이라는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지도 모르지. 여하간 철학사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진리 인식에 관한 물음들을 훑어봐도 그렇고 인간에겐 근본적으로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망이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음이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아. 그러나 기독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굳이 나의 인간에 대한 불신관을 전제로 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진리 도달 운운의 지극히 인간적인 이상 내지 희망만큼이나 막연하고 불안한 것은 없을 것이네. 하지만 神을 떠난 인간에게 비록 막연하게나마 희망이라는 것마저 없다면 그 어디서 위안을 얻을 수 있겠나?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세. 그랑에서 출발한 얘기가 너무 멀리까지 나아가 버렸어. 다음 기회에 파늘루 신부 얘기를 하면서 이번에 못다 한 말을 하기로 하세. 휴머니즘이라든가 인간 이성의 문제에 대해선 다음 번에 좀더 심도 있게 다뤄 보기로 하자구.

잘 자게나. 나도 눈 좀 붙여야겠어.

1994. 3. 25.  철학적 신앙을 꿈꾸며  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