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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씨의 사기 수법
정말이지 장씨의 사기 실력은 실로 대단하다. 그는 그렇고 그런 평범한 사기꾼이 아니다. 변화 무쌍하기가 이를 데
없다. 사기의 대가답게 자신을 어떤 한 틀에 고정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정체를 바꾸어 나간다. 순수 리얼리스트인 척해 보기도 하고, 마르크스주의자/사회주의자인 척해 보기도 하고, 계몽주의적 지식인인 척해
보기도 하고, 모더니스트인 척해 보기도 하고, 포스트모더니스트인 척해 보기도 하고, 리버럴리스트인 척해 보기도 하고, 심지어 불교와 노장(老莊) 철학에 심취한 척해 보기도 한다. 요컨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으면서 마치 죄다 알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포장하고 있다는 얘기다. 하여간 장씨는 이러한 전력(前歷)을 바탕으로 이번에도 또 한 차례의 사기 패션 쇼를 시도했다. 이번 쇼에서 주목할 점은 장씨가 주로
노장 철학에 키 포인트를 두면서 양념으로다 리얼리즘과 사회주의와 계몽주의를 적당히 뒤섞고 있다는 것이다. 이게 대관절 무슨 얘기냐?
<나쁜 영화>에서 장씨가 정작 주목하고 있는 대상은 막돼먹은 10대 애새끼들이 아니라 바로 '행려'다. 다시 말해서 장씨는 행려/거지를 자신과 최대한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거지들에
대한 애정 고백까지 서슴지 않는다[<씨네21> 제115호, 27쪽]. 보통의 사기꾼이라면 대개가 자신의 우월한 능력을 과시하는 한편, 고상함과 성실과 청결과 매너를 통해 뭇사람을 현혹하려 들
것이다. 고단수 사기꾼인 장씨는 이러한 전략을 비웃기라도 하듯 반대로 자기는 거지처럼 게으르고 무책임하고 불량스럽고, 유치한 걸 좋아하며, 예술주의나 작가주의 따위에 별 관심이 없고, 결국 잘나지도
고상하지도 않다고 천명한다[<씨네21> 제115호, 26-27쪽]. 이렇게 자신의 '거지 취향'을 환기시키고, 자신의 거지 이미지(실제로 언론에 포착되는 장씨의 차림새는 언제나
거지같이 꾀죄죄하다)를 그 구체적 표상이자 동일시의 대상인 영화 속의 거지들에 밀착시킴으로써 장씨가 얻는 심리적 부대 효과는 실로 막대하다.
무엇보다도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거지'가 우리에게 주는 시각적 시니피앙(能記) 효과다. 거지는 더럽고 지저분하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준다. 이러한 거지의 더러운
행색과 몸뚱아리는 시각 중심의 예술인 영화, 그것도 '나쁜' 영화에서 '나쁨'을 형상화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방법으로 이용된다. 그러니까 <나쁜 영화>에서는 이 사회가 비규범적인 것이라 인식하고 있는 것들,
곧 '나쁜' 것들이 총체적으로 인간의 몸-거지의 더러운 몸뚱아리로 환원되고 있다는 얘기다. 더러운 몸이 이렇게 나쁨의 물리적 등가물로 대체될 수 있는 이유는 문명 사회가 청결과 위생을 미덕(?)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거지들의 몸뚱아리는 문명 사회의 청결을 위협하는 불결한 요소이자, 위생을 유지하기 위한 문명 사회의 근면과 성실 자체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게으름과 나태의 표상이라는 점에서 불량한 요소요,
反사회적 요소요, 나아가 '惡'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씨는 이러한 -참으로 그럴 듯한- 의도를 가지고 자신의 영화 타이틀에 '나쁜'이라는 수식어를 집어넣은 것일까? 천만에! 장씨의 <나쁜 영화>는 그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진지하게 나쁨/악을 천착하고 있는 영화가 아니다. 나쁨/악에 대한 어떠한 면밀한 성찰도 찾아볼 수 없다(설사 애초의 필름이 공윤의 심의를 무사히 통과했다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저 거지의 더러운 몸뚱아리만 쓸데없이 자꾸 보여 주면서 표피적 현상이나 훑고 지나가기에 바쁜 '후진' 영화에 불과하다. 거지의 더러운 몸뚱아리는 그냥 더러운 채로 보여지면서
관객에게 혐오감과 불쾌감만 잔뜩 안겨 줄 따름이다. 이 몸뚱아리가 그나마 의미를 갖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장씨와 연결됐을 때만이다. 즉, 거지의 몸뚱아리는 장씨의 거지 취향과 거지 이미지라는 불량스러움과
결합됨으로써만 비로소 '나쁨'이라는 인격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제 더러운 거지들은 나쁜 거지로 그 의미가 바뀌고, 나쁜 거지는 그대로 나쁜 장씨가 된다. 그리고, 나쁜 장씨의 나쁜 아이콘에 의해 <나쁜 영화>는
마침내 후진 영화가 아닌 '나쁜' 영화로 격상한다. 그러니까 영화는 '영화 자체의 나쁨'으로 인해 나쁘다는 평가를 받는 게 아니라, 나쁜 장씨의 인격성을 이식받아 나쁨을 획득함으로써 겨우 나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억지로 억지로 나쁜 영화가 된 <나쁜 영화>.
이리하여 나쁜 장씨는 자기 연출의 결과, 나쁜 거지들을 통해 나쁜 영화로의 둔갑에 성공한다. 나쁜 장씨는 곧 나쁜 영화다. <둔갑 이야기 Metamorphoses>를 쓴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조차도
아마 인간의 이러한 기상천외의 둔갑술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거지'라는 시니피앙이 가져다 주는 시니피에(所記) 효과다. 더럽고 지저분한 거지의 몸뚱아리는 한편으로는 동정심의 유발이라는 시니피에 효과를
낸다. 문제는, 거지에 대한 동정이 우리에게 묘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이는 거지가 우리에게 가할 수 있는 최대의 '폭력'이다! 우리는 그들의 처지가 마치 우리 자신의 잘못이기라도 한 것처럼
가해자로서의 죄책감에 시달려야 한다[어떤 악질 거지들은 이런 사실을 악용하여 아예 드러내 놓고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강요하는 화술을 전개하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너희들처럼
애비 에미 잘 만난 덕에 잘살고 있는 놈들 때문이다. 그러니 어서 돈 내놔…."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말이 그야말로 딱 어울릴 법한 상황이 이 거지 발싸개 같은 거지놈들에 의해 벌어지는 것이다. 도처에 널린
거지들의 '과시적' 폭력에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달려야 하고, 나아가 이에 굴복까지 해야 한다는 건 정말 서글픈 일이다]. 거지의 이러한 폭력성은 장씨의 거지 아이콘을 한층 강화시켜, 종국에 장씨는
동정 받기를 바라는 피해자임과 동시에 우리에게 동정을 강요하는 가해자/폭력의 주체로 발전한다. 그러나, 우리는 동정에 가려진 그 폭력의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한 채 그저 씁쓸한 심정으로 거지들과 장씨에
대한 연민과 죄책감으로 괴로워해야 한다. 장씨는 우리의 선량한 마음씨를 철저히 이용해 먹는다. 우리의 선량한 마음을 후벼파고 난도질해 놓고는, 내 몸 하나 간수하기도 어려워 겨우 버티고 서 있는 우리를
도리어 잘먹고 잘사는 나쁜 놈들이라고 매도한다. 불쾌하다! 장씨는 정말이지 정말로 나쁜 놈이다!
그는 거지와의 밀착을 통해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유발시킴으로써 자신의 엘리트로서의 산뜻하고 청결하고 영악한 이미지를 철저히 숨긴다. 인텔리겐차로서 갖는 장씨의 이른바 속물 근성 역시
거지가 제공하는 프롤레타리아(엄밀히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지만 아무튼) 이미지를 통해 무화(無化)되고, 장씨는 도리어 순수/순진/순박한 사람이라는 일종의 면죄부를 발급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인텔리겐차이다. 조작된 거지 아이콘/프롤레타리아 이미지로 실체를 감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인텔리겐차로서 갖는 속물 근성과 이중성과 심각한 척하기는 어쩔 수 없이 배어
나오게 마련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교묘하기 이를 데 없는 이미지 조작-거지와 프롤레타리아와 피해자와 인텔리겐차와 가해자의 뒤섞음-을 거쳐 장씨는 결국 인민을 헛갈리게 만드는데
성공한다. 둔갑의 황제 장씨는 이제 그 마각을 드러내어 인민의 사고를 호도하는 사기꾼이자 인민의 정신을 개조하려는 폭력 혁명의 주동자/인텔리겐차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 나가기 시작한다.
일단 자신을 더러운 거지에서 나쁜 거지로, 그리고 나쁜 거지에서 나쁜 영화로 둔갑시킨 그 장한 능력으로 장씨는 자신의 영화가 후졌다는 사실을 철저히 감춘 채 뭔가 대단한 혁명적 의미라도 숨겨져
있는 양 인민을 또 다시 혼란에 빠뜨린다. 이렇게 인민의 정신을 혼미해질 대로 혼미해지게 만들어 놓은 연후에야 비로소 장씨는 인민을 선동하는 단계로 들어간다. 결과는? 선동의 대성공! 띨빵한 공윤은 장씨의 이
선동에 정당성을 불어넣어 준 일등 공신이다. 장씨는 공윤의 아낌없는 조력과 지원을 받아 가며 후진 영화를 진정한 나쁜 영화로 탈바꿈시키는 폭력 혁명을 드디어 완수하고야 만다. 가장 보수적인 학부모들까지도
"우리가 꼭 봐야할 영화"라는 찬사를 보내는 지경에 이르도록!! 인민 대중은 조작과 선동에 맥못추는 바보들이라는 사실이 입증되는 끔찍한 순간이다. 거지/장씨는 인민의 동정과 연민을 폭력으로 갚고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전가를 우렁차게 부르며 영광의 순간을 만끽한다.
물론,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에서도 일말의 의식을 잃지 않은 소수의 인민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그간의 선동을 거치면서 장씨의 위대한 영화에 대한 경외감으로 이미 압도당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 위대한 영화에 깔려 있는 위대한 정신과 위대한 메시지를 발견해 내지 못한 자신을 한하면서 죄책감이라는 후유증에 시달리게 될 것이 명약관화하다. 결코 황제의 새 옷을 볼 수 없는 신민들로서는 바보,
천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불충의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의 새 옷 만세!"를 외쳐야만 한다. 불쌍한 대한민국의 인민들이고, 불쌍한 대한민국의 관객들이다.
사기도 이런 악질 반동 사기가 또 있을까? 사기는 그냥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새 옷을 걸친 -실제로는 벌거숭이지만- 황제 장씨는 이제 권력자/지배자로서의 자신의 면모를 그럴 듯하게 포장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자신의 거지
취향과 거지 아이콘에 대한 고급화 작업을 시도한다. 이 작업을 위해 동원된 것이 老子 할배와 莊子 할배다. 이른바 노장 철학이라는 것. 장씨에 의해 노자와 장자의 철학은 20세기 신한국에서 마침내 위대한 거지
정신으로 승화(?)한다. 그리고, 이에 의거하여 거지 장씨는 세속의 모든 질곡을 초탈한 채 "道可道 非常道"를 읊조리는 노자와 장자의 똘마니로 또 한 차례 찬란한 둔갑을 하고, 더러운 거지의 몸뚱아리 역시
거룩한 신선의 신체로 영광의 변신을 한다. 이상의 내용을 학술 용어로 바꿔 얘기한다면, 그래도 무의식적으로나마 양심의 가책을 느낀 장씨가 노장 철학을 동원하여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려 했다는 것. 하여튼
분명한 것은, 본격적으로 신선 놀음에 심취하기 시작한 장씨가 이번의 사기 패션 쇼를 계기로 신선의 탈바가지로 자신을 위장한 채 앞으로도 계속해서 속 시꺼먼 인텔리겐차이자 좌익 파시스트로서 인민을 우롱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장씨. 이제 조금 있으면 쉰 살 아뇨? 거지나 양아치 흉내 고만 내고 이젠 제발 나이에 걸맞은 옷 좀 걸치고 다니시오. 나이 오십이면 지천명(知天命) 아뇨? 정 신선 놀음 계속 하고
싶으면 신선의 격에 맞게 외양이라도 품위를 갖추란 말이오. 아시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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