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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시대에 있어서 히브리인들의 질병관은 당시 고도의 문명을 이룩했던 민족들 역시 그러했듯이 원천적으로 초자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의 그것은 그들만의 유일신교에 입각한 독특한 종교관으로 인하여 타민족의 애니미즘이나 이보다 고상한 형태인 다신교에 의거한 초자연적 질병관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즉, 히브리인들은 근본적인 질병의 원인을 일차적으로 에덴에서의 인간 타락 후 인간과 만물에 내려진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 보고 있다. 인간 타락의 결과 질병이라는 것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는 창세기 3장 19절에 기록된 다음의 저주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는 에덴 추방 직전 아담과 하와에게 내려진 죄에 대한 형벌 중 마지막의 것으로, 여기에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곧 육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은 비단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흙으로 빚어진 모든 짐승들에게도 적용되었음을 창세기를 통해 알 수 있다. 형벌이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죽음이란 인간이 느끼는 가장 궁극적인 고통이라 할 수 있다[주 6]. 창세기에도 언급된 대로 타락 이전의 세계가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상태였기 때문에 도대체 고통이란 것은 존재할 수 없었다. 질병도 고통의 일종이라고 본다면 죽음이란 개념과 함께 질병이란 개념 역시 타락과 저주의 결과 도입되었음에 틀림없다. 죽음 이후에는 곧 부패의 과정이 이어진다. 현대 과학의 개념으로 볼 때 부패란 미생물의 작용을 의미한다. 저주 이후 나타난 미생물의 유기체에 대한 분해 활동은 나아가 전에는 없었던 미생물의 유기체에 대한 공격도 가능하게 했으리라는 점을 시사해 준다[주 7]. 질병이 전부 미생물, 곧 병원성 진균이나 세균, 바이러스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타락 이후의 세상에서 미생물에 의한 질병의 고통은 그 전(前) 시대에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여하튼, 타락과 저주의 결과 나타난 죽음과 환경의 극심한 변화(창세기 3: 17)는 전에는 없었던 고통과 고통의 원인 중 하나인 질병을 야기시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질병은 인간이 죄를 지었거나 신의 뜻을 거역했을 때 내려진다는 고대인들의 일반적인 견해와 맥을 같이 하면서도 한편으로 히브리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근본적인 차이점은, 질병이란 단순한 신의 일시적 채찍이 아니라 결코 인간 곁에서 떠나지 않는 영원한 형벌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변적인 질병관을 기초로 한다 하더라도 구약 성경에 나타난 수없이 다양한 질병의 원인을 모두 간단하게 저주의 결과로 돌리기는 어렵다는 주장들이 제기될 수 있다. 즉,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역은 절대로 공의(公義)로운 것이며 질병이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라면 어째서 사탄에 의해 인간이 질병의 고통을 당하는 것을 하나님은 묵과하실 수 있는가; 사탄이 하나님의 주권까지도 침해해 가면서 인간을 해할 수 있는 것인가; 설사 타락 이후 저주의 결과 생겨난 질병 때문에 -아무런 초자연적 개입 없이- 순전히 자연적인 원인으로 발병했다 하더라도 어째서 선한 사람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할 것 같은 자들도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그의 주권으로 그러한 자들을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어야 하지 않는가…. 대두되는 이러한 여러 문제들은 하나님의 공의, 도덕과 신앙, 고난의 의미 등에 대해 성경과 신학과 관련하여 발생되는 수많은 골치 아픈 논쟁들 중의 몇몇에 다름 아니다[주 8]. 여기서 이러한 광범위한 영역까지 다룬다는 것은 논제의 초점에서 벗어나므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으로 그치고, 구약 성경에 나타난 기록들을 통해 질병의 원인들을 '구분'해 보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구약 본문에는 수많은 질병에 대한 기록들이 나오는데, 대개가 치료적인 의미보다는 그 기사의 역사성 때문에 기록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보면 질병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좁혀진다. 첫째, 하나님의 사역(하나님의 심판, 진노나 재앙, 인격 형성을 위한 채찍). 둘째, 사탄에 의함. 셋째, 인간의 무지와 방심 등으로 인한 순수한 자연 원인의 결과. 때로는 <욥기>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상의 세 가지가 함께 작용할 수도 있으므로 명확한 구분이 힘들 때도 있다. 구약에서는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역에 속하는 기록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히브리인들이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우상 숭배를 통해 타락과 반역을 일삼아 온 데 대해 하나님의 징계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기록들은 심판이나 재앙이 너무나 끔찍하여 구약의 하나님은 왜 이리 잔인하기만 할까라는 의문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이러한 점에서까지도 욥을 책망한 엘리후와 같이 "하나님은 그 권능으로 큰일을 행하시나니 누가 그같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누가 그를 위하여 그의 길을 정하였느냐. 누가 말하기를 주께서 불의를 행하셨나이다 할 수 있으랴.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 일을 노래하였느니라."(욥기 36: 22-24)라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로움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히브리인들에게는 질병마저도 앞에 구분해 놓은 세 가지 분류에 관계 없이 하나님의 거대하고 정의로운 사역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또, 하나님의 이러한 정의로움과 절대적임으로 인하여 히브리인들의 질병관은 타민족의 정령(精靈)에 대한 미신이나 신의 보복을 상쇄시키기 위한 주술, 마술적인 사고 등과 근본적으로 타협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질병에 대한 치료는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논의한 히브리인들의 질병관과 관련하여 치료나 의학관은 어떠했는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종교관으로 인하여 사실상 제한된 의학 지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또, 토라(이 중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주 9]에 기록되어 있는 바대로 모세가 제시했던 율법 가운데는 상당한 정도의 정교한 보건과 위생에 관한 규례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의학 문화를 발전시키기보다는 이 율법이 제시한 위생관에 따라 살아갔다. 이 위생에 대한 규례의 주재(主宰)는 제사장의 임무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이들에게 전문적인 의사 계층이 없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이 제시하는 위생관과 규례는 매우 실질적이었고 당시의 타민족의 것에 비해 상당히 우수한 것이어서 히브리인들의 엄격한 윤리관과 더불어 질병 예방에 큰 도움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히브리인들의 의학 발전을 방해한 가장 큰 요인은 모세의 율법이 시체 만지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주 10]. 그러나 이 역시 단순한 종교적 타부로서가 아니라 시체가 오염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기 위한 조처였다고 보여진다. 이미 수천 년 전에 '감염'이라는 개념이 히브리인들에게 있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의학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인체의 해부가 의학 진보에 필수적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시체 접촉에 대한 금기는 히브리인들의 의학 발전을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겠다.

고고학의 발달과 더불어 고대 문명권의 의학에 대한 면모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서양의 경우 대개 고대 이집트, 바빌로니아, 멕시코 등의 문명권 의학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상세하게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아무래도 이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많은 정보(기록된 문서나 석판, 토판 등)가 얻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히브리인들의 의학에 대한 연구가 팔레스타인 지방의 활발한 고고학적 발굴에도 불구하고 미진한 이유는 앞서 언급했던 히브리인 내부의 원인들 이외에도 학자들의 성경에 대한 무관심과 경시라는 외부적 원인 탓이 크다고 생각된다. 아무튼 서양 의학의 원류(源流)라 하면 그리스 의학, 이집트 의학, 아랍 의학을 드는 것이 관례인데, 한 가지 흥미있는 것은 모세의 율법에 나타난 위생관이 고대 이집트 의학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다. 구약 출애굽기 제2장의 기록에 의하면 모세는 이집트에서 태어난 히브리인으로서 이집트 왕가에서 왕자의 교육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집트인의 지식에 어느 정도 정통해 있었다고 여겨지는 모세가 이집트인들의 치료에 관한 지식을 히브리인들의 보건·위생에 사용했음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문제다. 사실 모세 5경('토라'의 동의어임)은 "그것들이 이집트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증거들로 가득 차 있다. 비평가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바빌로니아와 수메르의 전설들에서 연유된 것으로 주장되고 있는 창세기의 맨 처음 부분들까지도 이집트 언어에서 빌려왔음이 더없이 명백한 수많은 어휘들과 어근들, 표현 방식들이 있다."[주 11] 그러므로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보더라도 모세 5경이 모세 시대에 모세에 의해 쓰여졌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첨언: 모세 5경의 모세 저작권을 철저히 부인하는 '문서 가설(Documentary Hypothesis)'이라는 설이 여전히 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으나, 이 설은 2000년인 지금에 와서도 내게 별 신뢰감을 주지 않는다. 모세가 5경, 특히 창세기의 저자였다기보다는 편집자였지 않겠느냐는 추측이 차라리 더 그럴듯해 보인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이 430년에 걸쳐 이집트에 살면서 노예 생활을 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집트인들과는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탈출의 지도자 모세 역시 결코 이집트인의 지식과 사상을 율법으로 남긴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확실히 해야겠다. 히브리인 특유의 사유로 말미암아 그들은 이집트에서뿐만 아니라 헬레니즘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을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