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볼 때 히브리인의 자연을 초월한 전지전능의 창조주 개념은 곧 자연의 비신격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과학사가인 호이카스(Reijer Hooykaas)가 지적했듯이 유럽의 종교 개혁기에 프로테스탄티즘에 수용되어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가져왔다. 즉, 성경의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진실로 전능자시며 자연 세계는 신의 피조물에 불과할 뿐이니 역시 같은 피조물인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자연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신의 솜씨를 찬양하는 한편 연구, 관리해야 할 '신의 작품'에 불과하다는 견해가 대두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인간이 자연에서 해방되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자연이 인간의 지배 하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해 주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근대 과학이 출현할 수 있었다고 호이카스는 말한다[주 15]. 실제로 영미(英美)의 청교도들에게 있어 과학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로, "자연을 연구하여 피조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는 것은 성서를 공부하는 것과 거의 동등하게 의미 깊은 일"이며, "과학을 인간의 복지 증진을 위해 활용하는 것은 종교적으로도 매우 훌륭한 행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주 16]. 이런 점에서 서양의 근대 과학은 우리가 흔히 그렇다고 알고 있는 고대 그리스의 유산이 아니라 히브리·기독교의 유산임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자연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낳게 한 모태 역시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였다기보다는 종교 개혁(the Reformation)에 의한 프로테스탄티즘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그리스식 사유의 우월성과 계몽주의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종교 개혁의 진정한 의미를 똑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성을 확보해 준 결정적 계기는 종교 개혁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중세 유럽이 기독교 문화 위에 성립된 것임에도 정체되고 과학의 후진성을 면치 못했던 것은 앞서 말한 순수한 히브리·성경적 자연관을 물려받지 못한 탓이었다. 중세 기독교는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 사상을 빌려 왔기 때문에 히브리 사상의 진가를 올바로 인정할 수 없었다. 호이카스는 단언한다. "중세 과학은 그리스적 유산 때문에 발달하지 못했다"고![주 17]  이는 실로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다. 중세 유럽의 무서운 정체성은 모두가 카톨릭 교회의 독단 때문이라고 여겨 왔는데…. 그러나 이는 그리스인의 자연관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빚어지는 편견일 뿐이다. 근대 과학의 모태로 인정돼 왔던 그리스의 자연관은 비록 고대 근동의 문명과는 달리 자연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지만, 인간이 자연과 동등해지거나 이를 능가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철학자 플라톤이 말한 조물주마저도 자연을 영원한 관념에 따라 운영해야만 했기 때문에 자유가 없었다. 또, 이 조물주는 성경의 창조주와는 달리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으며, 다만 이미 존재하는 재료를 이용할 뿐인 '제작자'의 성질을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이 재료마저도 완전한 작품이 되기를 거부한다. 이러한 선재(先在)하는 물질로부터의 제작 개념은 그리스인의 창세 설화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또한 근동 여러 문명들의 창세 설화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모두 자연보다 열등한 조물주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조물주 개념을 버리고 그 대신 자연 자체가 제작자라고 보았다. 이는 자연을 살아 있는 유기체라고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오며, 나아가 생명은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자연 발생설(theory of spontaneous generation)을 탄생시켰다. 중세 유럽의 과학은 이러한 그리스의 사상마저도 제대로 전수받지 못했다. 중세인들은 아랍식으로 도색된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Galenos, A.D. 129-201)의 사상을 물려받았고, 이 두 사람의 권위는 지나치게 강조되어 과학의 정체를 빚어냈다. 이러한 과학의 후진성은 당연히 그들의 질병관이나 의학관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당시의 점성술과 마술, 세속적으로 변질된 기독교 종말 사상과 더불어 참혹한 역병(疫病)이 창궐할 때마다 중세인들은 세상의 종말이 왔다는 공포감에 떨면서 떼죽음을 당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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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걸어온 노정을 살펴보면 이 글의 논제가 히브리인의 질병관임에도 반드시 여기에만 집착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수차 지적한 것이지만, 히브리인 특유의 종교관과 사유 방식에 대한 고찰을 떠나서는 논제가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을 만큼 히브리인의 종교관은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비록 히브리인의 세속사는 보잘것없었지만 그들의 사유가 후대의 기독교 문화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음을 볼 때 그들의 사유 패턴-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면 성경 그 자체-을 살펴보는 것은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독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 비교 문화론적으로 살피려 애썼지만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히브리적 사유의 지금까지 무시돼 왔던 점을 살리려 노력했다. [주 18]

이제 글을 맺기 전에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이 있다면, 과학과 성경, 이성과 독단,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는 이원론적 발상에 대한 재고(再考)이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2대 원류 사이에 끼어 방황하거나 한쪽을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서구식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게 되는 비극이지만, 이것도 알고 보면 지나친 인본주의로 흐른 데 대한 균형의 깨짐이라고 여겨진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이원론적 사고에 젖어 한쪽에 대한 편견만 갖고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근대 과학 태동기에 과학의 선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원론적 발상을 타파하고 통일된 사고 체계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그 길이 성경 내에 있다고 나는 굳게 확신하는 바이며, 이 글의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다.

   후 기

이 논문은 필자가 대학교 3학년이던 1988년 겨울에 작성하여 이듬해 봄, 일종의 연보(年報)였던 학과 학회지 Microbial epoch  제3호에 실었던 것이다. 원래는 14세기 유럽을 강타했던 흑사병을 주제로 한 논문을 구상하면서 그 중 한 장(chapter)으로 써 내려갔던 것이나, 시간 제약과 자료 부족(그 때만 해도 인터넷이란 게 없어서 외국 원서나 논문 하나 구하는 데도 무척 많은 시간을 소모해야만 했으며, 또 그렇게 해서 구한 자료라 해도 별 신통한 게 없었다)으로 원래 구상했던 흑사병에 관한 논문을 포기하고 서둘러 이 한 장만 재정리하여 마감 시간에 겨우 맞춰 제출한 것이다. 굳이 '소고(小考)'라고 이름 붙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학회지에는 실었던 참고 문헌 목록도 여기선 불필요하다고 판단되어 생략했다.

지금 읽어보면 참으로 허점이 많은 엉성한 글이다. 부끄럽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필자가 생애 최초로 진지하게 학문적 사고를 펼쳤던 글이란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기념이 될 만한 논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10년도 전인 과거에 쓰여진 글임에도 다시 읽어보니 그 때나 지금이나 필자의 기본적인 시각은 그리 크게 바뀐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단, 성경적 창조론과 이른바 창조 과학에 대한 시각은 부정적으로, 그리고 신학자 카를 바르트에 대한 시각은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어쨌든 한 사람의 사고 체계는 학문의 맛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20대 초반에 이미 그 골격이 완성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 이후의 생은 따라서 -좀 서글픈 얘기이나- 그 골격에 살을 붙여 나가는 과정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문득 당시 필자의 글쓰기를 독려했던 고황@ 형이 생각난다. 고 형은 학회지 제3호의 편집자였다. 글 쓰는 이에게 있어 자상한 편집자의 존재와 독려는 천군만마와도 같은 힘을 발휘한다. 졸업 후 연락이 끊긴 고 형. 필자도 그러하지만 이제 고 형 역시 전공 학문과는 상관 없는 길을 걷고 있을 터. 어디서 무얼 하며 사는지….

의학이란 분야에 대해 생애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볼 기회를 만들어 주었던 이 논문. 기나긴 시행착오의 고통스런 우회로를 거쳐 비로소 의료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 이즈음 나의 피는 온통 분노로 끓고 있다. 노쇠하여 사고가 경직될 대로 경직된 대통령과 그의 무지/무능한 정권이 벌이는 '폭정'으로 인해 국가 의료 체제가 완전히 붕괴될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라고? 웃음밖에 안 나온다. 권력 기구의 정당하지 못한 억압에 대한 저항은 시민 사회의 구성원이 필히 갖추어야 할 덕목이자 역사적 의무이다. 나는 시민 사회의 한 일원이고자 한다. 나아가 나는 기독敎徒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기를 원하며, 종교인이기 이전에 글자 그대로 크리스천이기를 원한다. 정당한 분노와 항거와 불복종은 크리스천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예수 크리스트/크롸이스트/그리스도는 항상 천국만을 부르짖은 분이 아니었다. 그는 이 세상의 부조리와 악에 맞서 적합한 분노를 표현할 줄 알았던 분이었다. 대한 민국의 기독교도들은 너무나 이원론적이고, 또 영성에만 매달려 있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길 스스로 포기했다. 나는 단호하게 말한다. '폭정은 사탄적이다! 따라서 그것에 저항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이다!'라고.

새천년의 첫 광복절을 맞이했건만 대한 민국은 여전히 진창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과연 우리 나라는 국호 그대로 民國인가? 내가 보기에 대한 민국은 껍데기만 민주 공화국일 뿐, 그 멘탈리티는 중앙 집권 왕정 관료 체제였던 조선 왕조의 연장선상에 머물러 있는 일종의 왕국이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자칭 '남한의 빨갱이'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도 사정은 전혀 다를 게 없다. 아… 마냥 답답해진다.  2000/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