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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가 가져다 준 역기능 중의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사람들이 단순 정보를 지식, 곧 '앎'으로
착각한다는 것일 게다. 안다는 것에는 그것을 아는 자신의 의지와 입장이 개입되어 있다. 안다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 사고되고, 그 사고 과정을 거쳐 분류되고, 그 분류 과정을 거쳐 다시
종합되고, 그럼으로써 자기 몸에 각인이 되어 결국 자신의 입장들 중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네트가 제공해 주는 수많은 정보들은 그 정보의 과잉이 그것들의 지식화를 차단하는 역효과를
자아낸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끝없이 밀어닥치는 정보의 홍수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 그것은
오히려 사람의 삶을 종국엔 피로하게 만들 뿐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많은 사람들은 네트가
제공하는 단순 정보들로 기워 맞춘 누더기 속에 웅크리고 앉아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는 선별 작업과
이를 통한 피아 투쟁에만 골몰하고 있다. 자신의 입장을 자신과 입장이 다른 타인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상호 존중의 방식을 통해 지식을 나누는 양상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걸치고 있는 누더기의 문양이 자기 것과 같은가 아닌가를 통해 아군과 적군을 가른 뒤 적이라 '짐작'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돌격하는 것을 장기로 아는 저열한 패거리 정신이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시간과 인내를 요하는 입장 갖기로서의 앎의 과정은 철저히 무시되고, 단시간 내에 얻은
정보들을 가지고 누가누가 더 그럴듯하게 거짓말을 잘 늘어놓는가가 관건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것을
어떤 사람들은 흔히 인터넷 민주주의 또는 토론 문화의 활성화, 시민 의식 함양 등등으로
미화하며 대단히 기뻐하곤 한다. 과연 그럴까? 미숙함은 용감함이라는 미덕 아닌 미덕으로 대치되고
그 용감함(실은 만용)에 힘입어, 네트에 길들여진 대한 민국의 숱한 어.린.이.들은 오늘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열심히 열심히 자기도 모를 소릴 지껄여 대기에 바쁘다. 그 지껄임의 밑천인 네트 상의 누더기
정보들을 자신의 온전한 지식으로 착각하거나 혹은 스스로를 기만해 가면서 말이다. 네트에는 대뇌(大腦)
대신 정보라 불리는 대뇌만한 암덩어리를 해골에 쑤셔 넣고 돌아다니는 무뇌아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홍상수의 괴물은 비단 영화 속 얘기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공부'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단순 정보 습득이라는 낯짝 분칠 테크닉만 현란하기 그지 없는
무뇌아들이 쏟아내는 똥도 과연 그 존재 가치를 인정해 줘야 하는가? 나는 네트와 함께 성장하여 그
네트의 하수구 생리에 익숙해져 있는 무뇌아들의 경박함과 천박함이 짜증난다. 진짜 지식이 아닌
네트의 누더기 정보들을 마치 진짜 지식인 양 포장하고 위장하는 수많은 뻔뻔함들이 역겹다는 얘기다.
-무뇌아라는 표현이 기분 나쁜가? 그렇다면 다시 어린이라는 점잖은 표현으로 돌아가기로 하자.
결과야 마찬가지겠지만 여하튼- 그들은 그걸 포장으로도, 위장으로도 여기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에겐
오히려 자연스러운 행위인 듯하다. 뭐가 문제일까? 나의 기본적인 시각이나 사고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네트의 과잉 정보가 어린이들을 능력 이상으로, 필요 이상으로 자극하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닐까? 껍데기 포장 능력이 미숙과 성숙, 어린이와 어른을 판가름하는 결정적 요인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참 서글픈 일 아니겠는가? 정보는 껍데기다. 껍데기는 지식이 아니다. 따라서 지식은 정보가
아니다. 아니, 지식과 정보는 다르다. 지금 네트에는 얼마나 많은 어린 껍데기들이 스스로를 성숙한
어른이라고 착각하며 돌아다니고 있는가?
그럼에도 나는, 작년에 나를 매우 사악한 적으로 간주하여 인정사정 없이 '앞으로 돌격'을 감행한
네트의 어린 껍데기 패거리에게서 실로 많은 것을 배웠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나의
위대한 반면 교사가 되어 주었다. 그들의 활활 타오르는 무모함, 저돌성, 경직성, 배타성, 그리고 이에
끝없이 휘발유를 끼얹는 그 경탄할 만한 무식함을 지켜보면서 나는 나 스스로를 반추해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불행히도 그들의 저열한 속성들은 거꾸로 나의 것이기도 했으며, 그래서 그들이
혐오스러워지는 만큼 나 또한 나 자신에게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깨달음은 일순간에 찾아온다고
했던가? 내가 그 때껏 높은 성채를 쌓아 단단히 지키고 있던 모든 편견과 무지의 공든(?) 탑이 어느 날
갑자기 너무도 간단하게 무너져 내림을 발견하면서 나는 내가 그간 너무도 무모하고, 저돌적이고,
경직되어 있었으며, 배타적이고, 또 무진장 무식했었음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말이다. 조금
혼란스러우나마 나는 그 즉시 또한 내가 스스로에게 얽어매어 놓았던 이런저런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졌음을 알게 되었다. 예수나 석가모니의 깨달음에 비할 바야 못 되겠지만, 이것도 깨달음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건 내가 기존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말'의 해방감을 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방감을 맛보게 해 준 네트의 어린 껍데기 반면 교사들께 나는 이 자리를 빌어 한 번 더 감사드리고
싶다. 그들의 헌신적인(실로!) 노력이 없었다면 나의 편견과 무지는 더 오래 지속되었을 것이고,
그만큼 괴물로서의 나날들도 연장되었으리라.
특별히
한 반면 교사께 감사를 표하고 싶은데, 그것은 그가 다른 괴물들의 연타 잽으로 인해
심약해질 대로 심약해진 나에게 결정타를 날려 한 방에 K.O.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한 방이
아니었으면 나는 현재와 같이 큰 폭으로 변화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 반면 교사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다른 괴물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모순과 자기 분열의 추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여기서 새삼스럽게 이를 파헤칠 이유는 없는 것이고,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다른 괴물들의
아우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자만의 특별한 차별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질책과 힐난과
험담과 비아냥거림과 울부짖음 중에서 특별히 나의 주목을 끌었던 것은 바로 내가 갖고 있던
지식인상에 대한 지적이었다. 다른 대목은 몰라도 이 대목에서 나는 정신이 번쩍 나면서 나의
과문함을 통렬히 깨달았는데, 그 요지인즉슨 내가 한 마디로 엉터리에다 사이비 지식인이라는
것이었다.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프랑스의 장-폴 사르트르에게서 지식인은 사회로부터 어떤 역할을
위임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지식인을 자처하는 길 이외엔 자신이 지식인임을 증명할 어떠한
방도도 없다는 가르침을 받은 바 있는 나로서는 이를 계기로 그 때까지의 나의 이른바 '지식인 자처
방법론'을 그 밑둥부터 재고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나는 지식인 흉내만 내고 있었다는 실로
뼈아픈 자각에 도달했고, 이런 이유로 <웹진영화>에 실었던 <친구>에 대한 글의 책임을 져야만
했다. 왜? 나는 사이비 지식인이 분명했으니까. 책임질 수 없는 글을 쓴 것이 분명하니까. 변명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후 나는 지식인됨에 관한 고민을 계속 해 나갔다. 물론 다른 문제들과의 병행을 통하여 해결해
가야 할 문제였지만, 어쨌든 이는 나의 정체성과 관련된 핵심이었기 때문에 주된 고민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다시 면밀하게 숙독하였고, 내가
사르트르를 철저하게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기(前期) 사르트르의 '시선(視線)'의
문제에만 온통 빠져있던 나로선 후기(後期) 사르트르가 보여 주었던 앙가주망(engagement) 정신의 진면목을
전혀 알려고 들지 않았고, 그래서 전기 사르트르와 유사한 류의 난관에 봉착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오늘날에는 결코 타당하다고 볼 수 없는 사르트르의 -행동 양식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적
지식인관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견지한 문제 의식과 그가 감동적으로 묘사한
지식인상에는 대체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그가 프랑스의 과거 역사를 탐구하여 얻은
지식인의 형성 과정은, 조금만 변용하면 멀리 대한 민국에서 살고 있는 나라는 존재에게도 대부분
들어맞는 해석 방식이다.
사르트르의 해석에 의하면 지식인의 부르주아적 출신 성분 내지 계급 성분은 "부당한 특권"이다.
"설사 그가 온갖 역경을 훌륭하게 헤쳐 나왔더라도 그렇다." 왜냐 하면 그는 기본적으로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을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사회적 아비투스(habitus) 개념으로
보완하면, 나라는 존재가 갖는 부당한 특권은 나 자신에게 있어선 참혹한 '저주'가 된다. 또다시
사르트르의 말을 빌자면 "지식인이란 자기 내부와 사회 속에서, 구체적 진실에 대한 탐구와
지배자의 이데올로기 사이에 대립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나의 몸에
체화된 아비투스는 내가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철저히 순응하고 있다는 산 증거이지만, 반대로
나의 깨달음은 나라는 존재가 온몸으로 증거하고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그럼으로써 나의
내부에서 균열을 일으켜 스스로를 모순에 빠뜨리는 것이다. 이 모순에 찬 존재를 가리켜 사르트르는
"유례 없는 괴물"이라거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곤혹스런 괴물"이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저주받은 괴물…. 지식인을 자처하는 나의 정체성은 내가 나의 내부에 고이 잠들어 있던
모순을 들춰냄으로써 마침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이 괴물로부터 출발한다. 이 괴물을 사람의
길로 들어서게 하고자 나는 사르트르의 조언대로 자기 자신에 관해 조사하고 탐구해
나가기로 했다. "자기를 조화로운 통일체로 변환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어느 식자의 지적처럼
"상대의 악에서 나의 정당성을 끄집어내는 것은 노예의 철학"에 지나지 않은 것이기에 나는
나를 공격한 숱한 홍상수의 괴물들에 대한 원망을 접고 "자신을 긍정하며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해"
나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글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심지어 한없이 늘어지고 있기까지 하다. 불길한 조짐이라는 불안감마저
생긴다. 그만큼 할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불안이 단순한 기우였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이 글이 꼭
마무리되어 최종 마침표를 찍게 되기를 소망한다는 얘기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나는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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