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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겟돈 Armageddon> 잡기장 1/4  
잡기장(雜記帳) - Ver. 2.1

원래 이 글은 1998년 가을, 웹진영화의 REVIEW 섹션에 동일한 제목으로 실었던 것이다. 애초엔 가벼운 마음으로 쓴 짤막한 글이었는데, 몇몇 독자 분들의 따끔한 지적을 반영하여 두 차례 버전-업(Ver. 1.0 → 2.0 → 2.1)이 이루어진 결과, 지금처럼 덩치 큰 글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잡기장'이라는 제목이 가리키고 있듯이 심각한 내용이 아닌 만큼, 독자 분들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주시기 바란다. 2000/06/11.

이 영화에 숨겨진 상징성과 그 놀라운 의미를 파악해 보겠답시고 구약과 신약 성경을 통틀어 오로지 요한 계시록 16장 16절에만 딱 한 번 언급되는 단어 '아마겟돈'을 찾아 성경 66권을 하나하나 이 잡듯 뒤져 나간다는 건 정말 미친 짓이며, 나아가 기독교도도 아니면서 '아마겟돈'이 요한 계시록에 언급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애매모호함의 극치인 요한 계시록을 두 눈 부릅뜨고 밤낮으로 연구하는 행위는 더더욱 미친 짓이니 이는 1997년 3월 지구 근처에 헤일-밥 혜성이 출현했을 때 이를 지구 종말의 징조로 믿고 자기들만 UFO 타고 천국 가겠다며 집단 자살한 미국의 소위 '천국의 문(Heaven's Gate)'이라는 사교(邪敎) 집단 또라이들이 벌인 소동과 다를 바 없는 짓거리다. 같은 이치로, 모호함의 수준으로 치자면 요한 계시록보다 한술 더 뜨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시들을 탐독한다거나 혹은 UFO 광신자인 클로드 보리롱의 국제 라엘리안 운동 협회 한국 지부 소속 또라이들이 주장하는 헛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 역시 <아마겟돈>을 보고 즐기는 데 있어선 백 퍼센트 상관 없는 미친 짓이라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얼빠진 국수주의를 앞세워 <아마겟돈>을 만화가 이현세가 만든 동명(同名)의 그 잘난 애니메이션과 비교 분석해 보겠답시고 비디오 테이프 빌리러 비디오 숍 가지도 말 것. 천국의 문 교주였던 마샬 애플화이트(역시 1997년에 자기 똘마니들과 함께 자살했음)가 천국에서 사과 따먹다가 내려다보고 낄낄거릴 수도 있다.

마이클 베이가 감독한 제리 브룩하이머제(製) 영화 <아마겟돈>은 역시 이들 두 흥행사의 면모를 과시라도 하듯, 작년(1998년) 여름 국내 개봉한 이른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 중에선 단연 최고 품질이었다. 제리 브룩하이머가 제작한 영화들은 봐도 일단 관람료가 아깝지 않을 만큼의 재미는 제공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곧 재미의 보증 수표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감독 마이클 베이는 전작들인 <나쁜 녀석들>(1995)과 <더 록>(1996)이 말해 주고 있듯이 영화를 지루함 없이 재미있게 만드는 데는 도사급이다. 따라서 제발 좀 재미있어 달라고 사정하다시피 하면서 만든 <아마겟돈>을 보고 나서 재미없다고 투덜거리는 사람은 상당히 비관적인(좀 좋게 얘기해 주자면 '비판적인') 시각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거나 연령대가 중년층 이상일 확률이 꽤 높다. <아마겟돈>은 그냥 보고 즐기라고 만든 영화다. 여기에 굳이 괴상한 토를 달아 가며 영화가 어쩌니저쩌니 불평을 늘어놓는다는 자체가 어쨌든 넌센스다. 나는, 국내 영평가들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에 부지불식간 전염되어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전술이 어떻다느니 할리우드의 보수성이 어떻다느니 재난 영화에 숨겨진 의미와 전략이 어떻다느니 재난 영화의 세기말적 의미가 어떻다느니 재난 영화들은 시나리오가 부실하다느니 재난 영화의 묘사는 비과학적이라느니 남성 가부장제가 어떻다느니 가족 이데올로기가 어떻다느니 영화상의 브루스 윌리스는 미국 중산층 백인 남성의 논리를 대변하고 있다느니 영화가 여성을 비하시키고 있다느니 미국의 패권주의가 어떻다느니 직배 시스템이 한국의 영화 시장에 미치는 악영향이 어떻다느니 하는 따위의 온갖 삐딱한 시선으로 무장한 채 <아마겟돈>을 보지 말고 일단 그냥 즐기라고 권하고 싶다. 기껏 자기 쌈짓돈 털어서 본 영화인데 재미를 못 느낀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관객 자신의 손해일 뿐이니까.

자!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얼치기 좌파적 지식들, 즉 쓰레기들은 남김없이 기억 창고에서 들어내 밖으로 내던져 버리자. 그러고 나서 <아마겟돈>을 보라. 즐기라.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이 영화의 미덕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요컨대 아빠가 딸을 걱정하고, 딸이 아빠를 걱정하고, 젊은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그래서 결혼하고, 장인 될 사람이 사위 될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찢어졌던 가족이 재화합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지구의 안녕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대재앙 앞에서 인류가 의기투합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열광하거나 이따금 감동의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다 보면 할리우드의 보수성이란 게 그간 주워들어 온 것과는 달리 건전한 면도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는 것. 할리우드의 소위 보수성이란, 사실 알고 보면 어느 사회에서든 사람 살아가는 데에 늘상 요구되기 마련인 소박하고 기본적인 상식에 기반을 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식을 존중하는 영화라면 그게 설사 우리 나라에서 그토록 욕먹는 할리우드 직배 영화일지라도 근래 일부 한국 감독들이 예술이랍시고 내질러 놓는 거지 발싸개 같은 영화들에 비하면 훨씬 가치 있는 것이라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우리는 혹시 한국 영화들의 전반적인 수준을 너무 높게 평가해 주는 관용을 베풀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풍자가 아닌 냉소와 진지한 사유가 아닌 천박한 통속 철학으로 똘똘 뭉친 한국의 감독들이, 영화 만들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지칠 대로 지친 한국의 감독들이 척박하고 열악한 한국의 영화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무렇게나 배설해 놓은 똥을, 향유하지 않으면 안 될 무슨 대단한 문화 예술이라도 되는 것인 양 받아먹고 살아가야 한다는 건 그 얼마나 슬픈 일인가? 강대국 미국의 엄청난 자본력과 기술력으로 무장한 채 입 떡 벌어지게 만드는 장면들을 보여 주고, 일상의 상식으로 포장된 건전한 메시지까지 전해 주는 <아마겟돈>은 그래서 약소국 국민인 나로 하여금 비애감 비슷한 것마저 느끼게 해 준다.

지금까지 줄곧 <아마겟돈> 칭찬하는 듯한 얘기만 늘어놓았다. 그렇다고 <아마겟돈>이 무슨 엄청난 걸작이라는 얘길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결국 뻔하고 뻔한 내용에 불과한 걸…. 나도 어쩔 수 없는 지식인이다 보니 그냥 보고 즐기라고 만든 영화에 대해 끝내 괴상한 토를 달아가며 이러쿵저러쿵 불평이라면 불평이랄 만한 소리를 주절거려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다. 이 점 모쪼록 글 읽는 분들은 이해해 주시길 바라고, 만약 아직 <아마겟돈>을 안 본 분이 이 글을 읽고 계시다면 부디 이 이하의 글들을 훑어보기에 앞서 영화부터 보실 것을 권하고 싶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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