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1990년대 미국의 재난 영화에 대한 잡설과 <아마겟돈>
1990년대에 만들어진 미국의 재난 영화들이 <에어포트>(1970), <포세이돈 어드벤처>(1972), <타워링>(1974) 따위의 1970년대 재난 영화들과 구별되는 아주 뚜렷한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그건
가정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이와 동시에 재난을 극복하는 아주 강력한 아버지상/父權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상의 재난은 또 다른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된다. 즉, 재난이란 가정을
파괴하는 외적-내적 갈등의 영화적 형상화라는 것. 아닌게아니라 1990년대 재난 영화의 남자 주인공들은 상당수가 애당초 별거 상태의 남편 또는 결손 가정의 아버지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남자 주인공은
재난, 곧 가정 파괴 내지 해체라는 시련에 직면하여 이를 극복하고 해결해낼 방법을 찾기 위해 그야말로 눈물겨운 사투(死鬪)를 벌인다. 만약 사투가 승리로 끝나고 재난을 극복하게 된다면 그것은 결국, 무너지고
있거나 혹은 이미 무너진 가정을 재건하는 데 성공하여 전통적인 아버지의 위치로 복권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재난 영화들이 한결같이 주인공 남녀의 행복한 (재)결합으로 끝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결과인 셈이며, 인습적이고 통속적인 결말이라 해서 관객이 분개해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비록 영화상이지만 가정을 수호하기 위해 죽도록 고생을 했는데 보상이 없다고 해서야 어디 말이 되겠는가!
아무튼 이리하여 일부일처제 가정은 영화 속에서나마 그 영속성을 보장받게 되며, 남자-남편-아버지가 가정의 기둥이라는 전통적인 사고 방식 역시 여전히 재확인을 받을 수 있게 된다. 현재 미국에서 빌 클린턴/대통령/國父(?!)가
여자 문제로 인해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위신을 바로 세우느라 고심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아이러니컬한가? 클린턴이 지금 당장 필요로 하는 것은 어쩌면 아내 힐러리의 조력과 지원이 아니라
워싱턴 시 상공을 온통 뒤덮을 만큼 거대하고 위협적인 UFO이거나 혹은 지구를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진해 오는 초대형 소행성이거나 혹은 사담 후세인의 또 한 차례의 도박인지도 모른다. 재난 영화 속에서처럼
영웅적인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 이 모든 재난을 해결하고 나면 한낱 여자 문제쯤이야 벌써 잊혀진 채 뒷전으로 물러나 앉아 있을 테니까. 그러나 저러나 클린턴은 <인디펜던스 데이>(1996)의 미국 대통령 빌
풀먼처럼 초음속 전투기를 조종할 줄 아나? 전(前) 대통령 부시는 비록 구식 프로펠러기를 몰긴 했어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엄연한 전투기 조종사였는데….
역시 재난 영화에 해당하는 <아마겟돈> 또한 강력한 아버지에 의한 가정의 재건과 회복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1990년대 재난 영화의 공식을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그래서 감독인 마이클 베이가 <씨네21>과 가진 인터뷰 중, <아마겟돈>에서 가족애를 부각시킨 점에 대해 무슨 색다른
설정이라도 한 것처럼 강조하고 있는 게 도대체 이해가 안 간다.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데 말이다]. 게다가 아버지로 분한 브루스 윌리스가 <다이 하드>(1988) 이래로 쌓아 올린 성격 배우로서의 고정된
이미지가 이러한 재난 영화의 공식과 맞물리면서 <아마겟돈>은 한층 복합적인 코드를 내포하게 된다. <다이 하드>에서 브루스 윌리스의 배역은, 사회적 지위와 능력에 있어 한 수 위인 아내와 비교되는 못난
남편이자 별 볼일 없는 가장이지만 사고뭉치에다 고집불통인 덕분에 단신으로 흉악한 테러단과 맞서 그 손아귀에서 아내를 구해내고 이로써 가족 붕괴의 위기를 극복하는 형사 존 맥클레인이었다. 이 배역이 주는
강렬한 이미지가 <아마겟돈>에 이르러 거의 존 맥클레인만큼이나 또라이 수준의 유정(油井) 굴착 전문가이자 장성한 딸자식을 하나 둔 중년의 이혼남 해리 스탬퍼와 겹쳐지면서 브루스 윌리스의 위상은 악당의
손아귀에서 아내를 구해내는 용감한 가장, 하지만 여전히 평범한 '남편'이라는 코드로부터 몇 단계 건너 뛰어 강력할 뿐만 아니라 영웅적이기까지 한 '아버지'라는 코드로 옮아가게 된다[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아마겟돈>의 브루스 윌리스는 존 맥클레인 시절보다는 많이 점잖아진 모습을 보여 준다. 하긴 브루스 자신 또한 어느덧 불혹(不惑)을 훨씬 넘긴 나이이고 보면 언제까지고 철없는 애들 모양 방방 뜰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코드의 변환을 거치면서 브루스 윌리스는 실로 우주적 재앙을 맞이한 지구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자애로운 그리스도/神으로서의 아버지의 자리에까지
등극한다. 그리고 대속(代贖)의 원리에 투철한 아버지의 희생 덕분에 어머니 대지(mother earth)인 지구는 안녕을 되찾고, 그 어머니의 따스한 품안에서 그레이스/딸/여자와 A.J.프로스트/아들(과도 같은
존재)/남자는 아버지에 대한 그간의 오이디푸스적 갈등을 극적으로 해소하면서 마침내 가족의 화해와 가정의 재건, 나아가 인류의 번영이라는 결실이 맺어지게 된다. 이 찬란한 우주적 환희는 최종적으로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관객의 것이 되고 마는데, 특히나 미국의 수많은 평범한 백인 가장들의 것으로 환원되고 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은 브루스/맥클레인과의 동일시 과정을 거치면서 특별히 자기들과 다를
게 없는 (혹은 오히려 자기들보다 못한) 미국인 백인 남자들에 의해 지구가 구원을 받는다는 설정이라든가 그들 보잘것없는 남자들이 그간의 모든 허물을 용서받고 영웅적인 가장이자
아버지로서 가족 앞에 당당히 귀환한다는 설정 따위를 통해 위로를 받게 될 것이고, 마치 자기들이 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뻐할 것이며, 나아가 자기들도 그러한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착각에 잠시나마 빠져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이내 깨닫게 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즉, 영화상의 브루스와 그의 동료들은 결코 자기들과 같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
<아마겟돈>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분한 해리 스탬퍼는 사실 아주 비범한 인물이다. 애당초 그는 유정 굴착에 관한 한 세계적인 전문가로 등장하고 있다. 게다가 단 한 번도 굴착에 실패한 적이 없는
엄청난 경력마저 갖고 있다. 그의 수하에 있는 사람들 역시 -반쯤 정신이 나간 듯이 보이는 개망나니든 뭐든 간에- 자기 분야에서만은 유독 편집광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비범성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은 절대로 평범한 인간들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미국인-백인-남자-가장-남편-아버지-관객분들께서 이내 상대적인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되리라는 것은 시간 문제
아니겠는가? 이쯤 되면, 일각에서 자못 비장한 톤으로 "백인 블루칼라 남성들"이 주인공이니 어쩌니 하면서 마치 <아마겟돈>이 1990년대 재난 영화의 공식-주인공은
대개 해당 재난에 대해 전문적 식견을 갖추고 있는 과학자나 기술자 등의 화이트칼라 계층이라는-을 이탈한 변칙적인 영화라도 되는 양 떠벌리고 있는 게 몽땅 개소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역시
시간 문제일 따름이다. '백인 블루칼라 남성'이라고? 그래서 주인공은 소행성까지 날아가서 굴착 '공사'를 벌이는 쌩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NASA의 과학자님들께서는 고상한 백인 화이트칼라 남성이라서 지저분한
노가다판의 인부들과는 상종도 할 수 없다는 듯 깨끗한 홀에 모여 앉아 모니터나 들여다보면서 공사 지시를 내리고 있다는 건가? <아마겟돈> 같은 영화에서마저 계급간의 대립 내지 대결 구도를 찾아내려 하는
사람들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럽다. 무엇보다도, 인간 개개인의 비범성을 한낱 사회 계급적 차원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시각 자체가 문제다. 1990년대의 재난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남녀 주인공들은 그들의 사회적
계급 덕분에 재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게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의 전문 지식 때문만도 아니다. 그들의 승리는 궁극적으로는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비범성에 기인한다. <아마겟돈>의
주인공들 역시 그러하다. 그들은 우리 평범한 관객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