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근대화의 완성이다.[주 10]  아직 개인의 주체성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전근대 사회에서 근대 이후를 떠든다는 것은 실로 웃기는 일이다. 전근대적 이념의 화신과도 같은 존재인 공자(孔子)를 부활시키려는 시도는 -그것이 어떠한 형태를 취하든 상관 없이- 더더욱 웃기는 일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 취향 뒤꽁무니나 졸졸 따라다닌다는 것도 쓸데없는 짓이고. 우리는 일단 근대화부터 완결해 놓고 봐야 한다. 이 작업이 미루어지면 질수록 합리적인 시민 사회의 도래는 요원해질 것이고, 반대로 모질게 버티고 있는 전근대적 폐단들만 더욱 강화되어 우리 사회를 악화시킬 것이 틀림없다. 지금 사회에 복고(復古) 바람이 불고 있다는 분석이 나와 있다. 이 복고 바람이 <친구> 성공에 크게 기여를 했다는 얘기도 있다.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함으로써 극장을 잘 찾지 않는 30-40대를 극장으로 유인해 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인데…. 향수? 좋았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 대체 뭐가 향수이고, 또 뭐가 그리움이란 말인가? 어린 학생들이 머리 빡빡 깎인 채 시커멓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교복이란 걸 억지로 입고 지저분한 먼지투성이 교실에서 툭하면 사이코 선생들의 분풀이 대상이 되었던 그 시대가? 어린 남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군복(교련복도 군복이다) 입고 총검으로 사람 찔러 죽이는 연습을 하던 그 시대가? 그 X같던 전근대적 국가주의 시대가 그리도 좋았단 말인가? 그리도 그립더란 말인가? 다들 제 정신인가?

복고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복고란 그 과거가 좋았건 나빴건 상관 없이 그저 과거에만 집착하려 드는 수구적 의식을 바닥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변화가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억지로 모든 것을 과거로 되돌리려 애쓸 이유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그것은 변화무쌍한 미래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에 복고 바람이 불고 있다는 얘긴 아무래도 근거가 있는 얘기인 것 같다. 좋았던 과거의 빛나는 얼을 오늘에 되살리겠다는 일념 하에 중ㆍ고등학교 교장놈들은 지금 다시 어린 학생들의 머리를 빡빡 밀고, 또 보기에도 꾀죄죄하고 거지 발싸개 같은 일명 교복이라는 구속복으로 학생들을 옭아매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부산의 교장놈들은 특히 심한 것 같다). 이런 한심한 놈들은 일본의 교과서 왜곡 문제나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행위를 비판할 자격이 전혀 없는 개자식들이다. 왜냐! 머리 빡빡 깎이는 짓이나 교복 입히는 짓이나 죄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뭐? 교육이란 건 규율의 강제가 전제되어야 가능한 작업이라고? X 까고 자빠졌네! 밥통 같은 교장놈들의 이러한 전근대적이고 반민주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발상을 지지하는 학부모놈들은 모조리 나가 뒈져야 한다. 그리고 지금 당장 교복 착용을 금지시켜야 한다. 머리 빡빡 깎이는 만행은 더더욱 금지시켜야 한다. 어린 학생들이 군인인가? 어린 학생들이 죄수인가? 교복이라는 이름의 제복 착용은 전체주의와 군국주의와 획일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민주적이고 자율적이고 다원적인 시민 사회에 역행하는 엽기적 만행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런데 뭐라고? 유오성과 장동건의 소위 1970-1980년대식 '얄개 패션'이 멋있다고? 당신들 모두 미쳤소? [주 11]

필자는 단언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복고가 유행하고 있는 게 정녕 사실이라면 그 복고는 다만 정신적인 퇴행이자 퇴보일 뿐이라고. 과거에 대한 반성적 회상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수구적 집착일 뿐이라고. 그리고 <친구>의 대성공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 반동적이고 배타적인 퇴행 현상을 설명해 주는 한 척도일 따름이라고. 곽경택 감독은 이런 점에서 사회 비판 능력이 없거나 대단히 부족한 감독이다. <친구>를 보면 감독 자신이 부산이라는 지역의 전근대적 정서에 완전히 함몰돼 있어 혹시 거리를 두고 대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 아예 결여돼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부산이 얼마나 미개하고 배타적인 동네인지, 얼마나 폭력과 야만이 난무하는 동네인지 그 실상을 감독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그는 <친구>에서 부산의 이러한 단점들을 터무니없이 미화시키고만 있다. 나아가 시종일관 자신의 좋았던 과거 기억에만 의지해서 만사를 그저 감회 어린 시각으로만 그려내고 있다. 심지어 잔인한 폭력의 묘사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예를 들어, 시험 점수가 나쁜 학생들을 향한 선생의 무분별한 폭력 행위를 감독은 그저 준석과 동수의 퇴학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우스꽝스럽고 의미 없는 에피소드 정도로 이용하고 만다. 따라서 관객은 선생의 도를 넘어서는 폭행을 비판적으로 볼 기회를 차단당한 채 감독의 향수를 빙자한 폭력의 정당화 작업에 이내 동조해 버리게 된다. 교사의 처벌로서 그 정도쯤이야 당연한 것이고, 또 그냥 넘어가 줄 수 있는 문제란 얘기인가? 그건 처벌이 아니라 무지막지한 폭행일 뿐이었는데도? 유감스럽게도 곽 감독은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것 같다. 막말로 '그게 뭐 어때서? 학교 선생들은 원래 그래. 재밌잖아? 어차피 영화인데'라는 식이다. 우리 같이 한바탕 아련한 추억 속에 잠겼다가 깨어나면 그것으로 그만이라는 얘긴가? 곽 감독의 의식 수준이 전근대적이고 후진적인 것이야 개인 사정이니 어쩔 수 없겠지만, 그걸 무방비 상태의 관객들에게까지 심어 주는 건 좀 곤란하지 않은가? 당대 사회상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나 반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영화 <친구>. 재현만 있고 성찰이 없는 영화 <친구>. 이 영화에서는 그저 모든 것이 퇴행하여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의 대상일 뿐이다. 아주 심하게 말해서 <친구>란 영화는 감독 개인의 회상을 비싼 돈 들여 정교하게 재현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필름 뭉치일 따름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온 국민이 장단 맞춰 가며 춤을 춰 주다니…. 국민들이여, 농락당했다는 느낌 혹시 안 드는가?

필자가 보기에 곽 감독은 민주 시민 사회의 원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전근대적인 위인이다. 필자와 동갑내기로 필자와 동시대를 살아오면서 이토록 전근대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필자로선 실로 경이롭기까지 하다. 부산이라는 전근대적 문화 풍토에 골수까지 젖어 살아 온 때문일까? <친구>는 전근대적인 사회 원리에 입각해 만들어진 영화다. '친구'라는 영화 타이틀 자체가 그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친구(親舊). 합리적인 근대적 계약 관계가 아닌 비합리적인 전근대적 의리와 정으로 맺어진 느슨한 관계. 남녀 사이의 사랑보다도 믿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친구, 그 중에서도 남자 친구들간의 우정이라는 것이다. 오우삼(吳宇森) 감독이 만든 <영웅본색 英雄本色>(1986) 같은 영화들 덕에 잔뜩 미화되어 버린 이 남자 친구들의 우정이란 알고 보면 그 얼마나 허약한 감정의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던가? 그 깊은 내면에는 경쟁심과 시기, 질투, 심지어 증오까지 도사리고 있는 우정이라는 이름의 '감정 상태'는 사실 별로 믿을 것이 못 된다. 중요한 것은 남자 친구끼리 술이나 퍼마시면서 외치는 시시껄렁한 싸나이 대 싸나이의 우정 따위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신뢰'이다. 그리고 그 신뢰는 그냥 얻어지거나 그냥 생기는 게 아니라 부단한 의식적인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친구>는 남자들의 우정, 그것도 미성숙한 남자들의 미성숙한 우정을 '좋은 것'이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치켜세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친구>에서 묘사되고 있는 우정은 이 세상 남자들이라면 한 번쯤 꿈꿔 봤을 법한 고고한 우정의 무의식적 원형(原型) 이미지, 즉 신화적 심성마저도 제대로 구현해 내지 못한 아주 치졸한 것이다. 그저 미성숙한 남자들의 판타지 세계나 일시적으로 충족시켜 주는 저급한 수준의 것이었다고 할까.

사실 조직 폭력배(이하 조폭)의 세계라는 것이 성숙하지 못한 남자들, 몸집만 어른이고 마음은 여전히 소년 상태에 머물러 있는 미성숙한 남자들의 것이다. 남자의 남성성(masculinity)만 극단적으로 과장하여 자신의 행동 양식으로 삼는 그들 조폭을 성숙한 남자라고 보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뒤따른다. 오히려 성숙한 남자의 내면에는 남성성과 여성성(feminity)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친구>라는 영화는 조폭들의 과장된 남성성에 기초한 미성숙함과 허세를 우정이라는 미명 하에 합리화시키고, 마치 그것이 성숙한 남자들(소위 진짜 싸나이들)의 세계라도 되는 것인 양 꾸며 대고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친구>에 등장하는 네 명의 친구 중 가장 성숙한(상대적인 의미에서!) 남자는 상택이지, 조폭이 된 준석이나 동수가 아니다. 준석이나 동수가 아버지와의 불화를 끝내 극복할 수 없었던 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이들의 미성숙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남자로서의 성숙은 아버지와의 대면을 통해 아버지와의 불화를 극복하고, 아버지를 자기 내면에 받아들여 소화하는 작업을 필요로 하므로…. 아버지라는 존재는 그것이 생물학적으로 죽었든 살았든 관계 없이 남성으로서의 아들이 자기 내부에 간직하는 남성의 영원한 일부이다. 생각해 보라! 아들의 아버지는 또 다른 아버지의 아들이었으며, 그 아들의 아버지 역시 또 다른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이렇게 보면 아버지란 존재는 그저 배척과 질시의 대상일 수만은 없는 것이다. <친구>는 이 아버지를 상실한 마초들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준석이나 동수와 같은 뭇 마초들의 개인적인 불행과는 별도로, 마초는 그러나 합리적인 시민 사회의 성숙을 위해선 사라져야 할 존재이다. 오늘날 요구되는 남성상은 주변 사람들 공연히 못 살게 구는 미성숙한 마초가 아니라 균형 잡힌 성숙한 '전사(戰士, warrior)'[주 12]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근대적인 대한민국은 지금 미성숙한 마초들로 넘쳐나고 있다. 멀리서 예를 찾을 것도 없이 자동차 운전대만 한번 잡아 봐도 절감하게 되는 사실이다. <친구>가 괜히 성공한 것이 아니다.

<친구>는 우리의 마초들을 열광시켰다. 그 이면에는 성숙보다는 미성숙, 개인보다는 우리, 합리성보다는 비합리성, 그리고 근대성보다는 전근대성이 요동치고 있는 대한민국의 딱한 현실이 자리잡고 있다. <친구>에 열광하는 숱한 마초들의 미성숙은 개인이라는 자율적 영역을 인정하지 않으며, 즉 무시하며, 대신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서 집단주의를 강화시키고, 그 집단주의는 거꾸로 개인의 무책임을 조장한다. 개개인이 이 무책임 속에서 안주하는 한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시민 사회로의 진행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우리라는 집단주의가 지리적으로는 지역주의, 보다 정확히 얘기하면 각 지역간의 알력과 대립을 획책하고 합리적인 의사 소통을 저해하는 '지역 할거주의'와 단단히 봉합됨으로써 더욱 강화되어 나가고 있는 추세라는 것이다. 민주 시민 사회에서나 적합한 지방 자치제는 전근대적이고 미성숙한 대한민국에 무리하게 이식되어, 민주주의를 촉진하는 대신 역으로 이기적인 지역 할거주의만 더더욱 강화하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2000년 4ㆍ13 총선을 상기해 보라. "적어도 영ㆍ호남의 경우, 경상도 사람과 전라도 사람이라는 사투리의 정체성이 시민이라는 민주적 정체성을 대체"했지 않은가? 대한민국은 조선 왕조 오백 년의 위대한(?) 중앙 집권 체제 법통마저도 제대로 잇지 못한 전근대적이고 비민주적인 지역 할.거.주의 국가이다. 영화 <친구>의 폭발적인 성공은 이 영화 전반에 깔려 있는 부산의 폐쇄적인 지역주의 정서가 사회 전체의 전근대적이고 후진적인 정서와 딱 맞물린 결과다. 호남쪽 관객수가 오히려 영남쪽보다 많았다고 해서 "지역간 화합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호들갑떨어 댈 개제(皆濟)가 전혀 못 되는 것이다. 물론 '전근대적 정서의 일체화에 따른 전 국민의 심화된 퇴행'이라는 맥락에서라면 <친구>가 지역간 화합에 기여했다는 제작사의 아전인수격 해석은 일말의 진실을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허허~. 대한민국은 여전히 전근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개발 도상국이다. 그리고 <친구>는 이 전근대의 견고한 틀을 더욱 견고히 하는 데에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지대하고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친구> 만세! 곽경택 감독 만세!! 대한민국 만만세!!! 전근대 국가 만만만세!!!!

자, 이제 마무리를 하자. <친구>는 '부산 영화'였다. 지역주의 정신에 충실한 부산의, 부산에 의한, 부산을 위한 영화였다. 한국 영화가 아니었다. 과연 <친구>의 대성공은 민주 시민 사회의 정착을 위협하는 새로운 지역 할거주의로의 전근대적 퇴행을 알리는 서막이 될 것인가? 꼬끼오~

P. S. 개인적으로 필자가 알고 지내는 모든 부산 사람들이 이 글로 인해 조금이라도 마음 상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최소한 이 글은 그들과는 상관이 없다. 그들은 필자를 이해해 주고 힘이 되어 주었던 따스한 마음과 차가운 머리의 소유자들이다.

*  이 글은 2001년 05월 5일, 웹진영화 제27호 이슈필름 섹션에 실었던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