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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편제 Seopyeonje>의 철학적 이해 1/4  
<서편제>의 철학적 이해
김용옥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바탕으로 한 재검토

이 글은 원래 1993년 5월 중순, 필자가 회원으로 있던 PC 통신 천리안 영화 동호회 SCREEN의 '영화를 보고 나서' 게시판에 실었던 글이다. 예기치 못했던 5월 말의 군 입대를 앞두고 팽팽한 긴장과 절박감 가운데에서 정성을 다해 쓴 글이라 지금도 애정이 가는 글이다. 그래서일까? 필자의 지적(知的) 치열함은 지금이, 미숙했던 그 시절보다도 더 못한 것 같다. 여기 올리는 글은 부제를 새로 달고 기존 주(註)를 보완한 것, 일부 문장을 다듬고 가감한 것 이외엔 1993년의 것과 동일하다. 2000/05/26.

1. 임권택 감독과의 짧은 대화에서 도출된 몇몇 상념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개봉된 지도 이제 대략 한 달이 흘렀다. 그간 이 영화에 대한 세간의 평은 거의 대부분이 칭찬과 흥분으로 일관했으며, 내 기억으로는 험담이나 악평은 별로 찾아볼 수 없었던 것 같다. 매스컴의 요란한 선전과 과대 포장도 어느 정도 그 열기가 누그러진 지금, <서편제>에 대한 좀더 심도 있고 면밀한 점검이 필요할 듯싶다. 시사회를 통해 미리 이 영화를 관람한 소수의 평론가나 영화광을 제외한 일반 관객들은 사실 그간의 온갖 매체가 동원된 '서편제 선전'으로 인해 <서편제>를 영화 텍스트 자체로서 대할 기회를 애당초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영화 자체보다는 그 후광 격인 명성에 눌려 지레 잘 된 영화이려니 하는 선입견을 갖고 영화를 보러 올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나는 이 글에서 <서편제>를 면밀히 분석하려고 들지는 않겠다. 사실 그럴 능력도 부족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좋고 싫음이라는 '느낌'의 문제로 간단히 돌려버리기도 싫거니와 그저 '걸작'이라는 감탄사만 연발하고 싶지도 않다. 내 나름의 논리로 <서편제>를 차분히 풀어 나가 볼 생각이다. 우선 글의 실마리를 지난 5월 2일 종로의 단성사 극장에서 있었던 지극히 개인적인 일화에서부터 풀어 나가고자 한다.

그 날은 대단히 화창한 일요일이었다. 나는 <서편제>에 대한 나의 시각이 옳은가를 재검토하기 위해 알 수 없는 흥분에 이끌려 두 번째로 단성사를 찾았다. 처음 <서편제>를 봤을 때 나는 이 영화의 상당 부분이, 철학자 김용옥 님(이하 존칭 생략)이 자신의 예술론을 전개한 저서 <아름다움과 추함>에서 언급한 판소리론과 부합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서편제>는 김용옥 철학의 영상화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잠정적 결론까지 내렸다. 이런 판단을 하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철학자 김용옥은 한때 활발히 한국 연극 영화계에 뛰어들어 활동한 경력이 있는 인물로서 임권택 감독과 손을 잡고 <장군의 아들 1>과 <개벽>의 시나리오까지 쓴, 임 감독과는 막역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김용옥 철학이 어떤 형태로든 임권택의 작가로서의 성숙에 영향을 끼쳤음은 충분히 상상해 봄직한 일이었다. 이러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나는 두 번째로 <서편제>를 보기 위해 단성사를 찾았던 것이다.

3회 표를 사고 극장 로비에 들어서서 좌석 배치도를 보기 위해 두리번거리던 중 나는 뜻밖에도 친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구석에 서서 관객들과 악수를 나누고 사인을 해 주고 있는 임권택 감독이었다. 그 옆에는 정일성 촬영 감독이 다른 사람과 환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과연 내 생각이 맞는지 확인해 볼 정말 좋은 기회가 아닌가? 말주변이 없어 평소에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를 진행하는 걸 고역으로 여기고 있던 나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주저 없이 임권택 감독에게로 달려가 인사를 나누고 곧 질문으로 들어갔다. 다음의 내용은 임 감독과의 대화가 끝난 직후 간단하게 메모해 놓았던 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 따라서 세세한 것까지 완벽하게 재현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크게 왜곡된 부분은 없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의 첫 질문은 '김용옥의 <아름다움과 추함>에 전개된 판소리론과 <서편제>의 상관성'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임권택 감독의 답변을 들으면서 그가 대단히 차분하고 겸손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이러한 좋은 인상과는 달리 그의 답변은 나로선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아직 <아름다움과 추함>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고, 나중에 읽어 보겠노라는 말만 했다. 나의 <서편제>에 대한 판단이 완전한 넌센스였다는 것이 곧 입증되어 버린 순간이었다. 게다가 다음 날, 조선일보 7면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 임 감독이 <서편제>를 이미 1978년쯤 소설가 이청준 님이 쓴 동명의 단편 소설을 읽으면서 작품화하기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의혹마저도 한 점 남김없이 사라져 버렸다. 첫 질문이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자 그 때부터 난 당혹감 속에서 형편없이 더듬거리며 질문을 이어나가야 했다.

두번째 질문은, '<서편제>에서 감독 스스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쇼트나 씬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에 대한 임 감독의 답변은 다행히도 나의 생각과 일치했다. 그는 주저 없이 롱 테이크로 잡은 유봉 가족의 진도 아리랑 쇼트를 답변으로 제시했다(이 때 임 감독은 롱 테이크니 하는 전문 용어를 전혀 구사하지 않고 나의 질문에 답해 주었다). 이 쇼트는 나에겐 초미의 관심사였기 때문에 나는 '이 쇼트에서 감독이 의도한 바는 무엇이냐'는 좀더 구체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대답은 참으로 솔직 담백한 것이었는데, 그 내용이 비록 내가 원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서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생각하면 할수록 적절한 표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임 감독은 유봉 가족이 걸어오던 그 구불구불한 흙길을 우리네 인간 삶의 긴 여정으로 보았다. 말하자면 시간의 흐름이라는 무형성(無形性)을 길이라는 공간으로 프레임에 담아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고 길이라는 공간으로 유형화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유봉 가족으로 상징되는 인간은, 마치 진도 아리랑의 노래 마디처럼 담담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면서, 즉 희노애락을 겪으면서 그렇게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정확하게 재현할 수는 없지만 임 감독은, "인생살이라는 게 언제나 슬플 수만은 없는 것이고, 때로 즐거울 때도 흥겨울 때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유봉과 송화가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춤추고 즐거워하는 장면은 이러한 인생살이의 한 면을 보여 주는 것이죠."라는 식으로 나에게 말해 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닌게아니라 이 진도 아리랑 쇼트는, 그 직전의 밀폐된 공간으로서의 여관방에서 돌팔이 약장수 내외와 대판 싸워 일자리를 잃은 뒤의 우울함과 비탄 후에 확 펼쳐지는 열린 공간으로서 관객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관객은 한층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비탄 뒤에 연출되는 유봉 가족의 흥겨운 춤사위는 관객에게 갈등의 극적인 해소를 맛보게 해 주는 효과까지 가져다 준다.

특별히 이 쇼트의 연출 기법이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인물들이 모두 프레임 아웃 된 뒤에도 한동안 동일한 화면이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법은 일본의 거장 오쯔 야스지로가 그의 작품에서 적절하게 이용했던 이른바 '빈 공간 효과'와 유사해서 흥미가 생긴다. 오쯔 감독 역시 인물이 프레임 아웃 된 이후의 텅 빈 공간을 계속 보여줌으로써 공간을 통해 일정한 시간의 흐름을 창출해 내고 있다. 물론 빈 공간 효과가 오쯔 감독의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쯔의 경우 그 공간을 시간으로 전이시킨다는 점에서 오쯔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것인데, 이제 임권택 감독에 의해 동일한 효과가 연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나서 역시 임 감독의 '거장다움'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 감독은 자기 작품의 독창성을 위해 일부러 다른 외국 감독들의 작품을 보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2000년 현재 나의 생각은 바뀌었다. 지적 미숙함이 임권택을 오쯔와 비교하게 만들었다. <서편제>의 진도 아리랑 쇼트는 오쯔의 '빈 공간 효과'와 아무 상관도 없다.)

이쯤에서 난 질문을 멈췄어야 옳았다. 사실상의 의문은 거의 해소된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좀더 알고자 하는 욕심은 나의 입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남은 것은 일종의 비애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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