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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편제 Seopyeonje>의 철학적 이해 3/4  

2. <서편제>에 나타난 '몸각'의 표현 방식으로서의 미장센

<서편제>는 판소리의 영상화라는 과제에 따른 '논리적 귀결'로 인해 미장센에 대한 깊고 섬세한 추구를 보여 주고 있다. 그 결과 나타난 아름다운 영상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그간 임권택 감독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일관되게 탐구했다고 보는 이른바 휴머니즘 표현의 극치라고 평가하는 것을 흔히 접할 수 있었다. 과연, 임 감독이 1980년대에 접어들어 만든 일련의 작품들-<만다라>, <씨받이>, <아다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개벽> 등-은 이러한 한국적인 토대 위에서의 휴머니즘의 추구라는 견해를 충분히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일본의 미조구치 겐지 같은 감독이 일본의 토속적인 내용을 영상화한 시대극(사극)으로써 1950년대에 이미 서구 비평가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전례도 있고 보면, 한국적인 휴머니즘의 일관된 추구가 임권택 감독의 세계 무대 진출에 큰 역할을 했음도 쉽게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해서 확장되고 깊어져 갈 임권택의 작품 세계를 그저 한국적인 것의 추구라는 측면에서만 다루어 버린다면 좀더 생산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미리 봉쇄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지 않을까?

1장에서도 이미 언급했다시피 본 2장에서는 철학자 김용옥의 몸각론과 판소리론에 의거하여 <서편제>를 읽어 보려고 한다. 나는 <서편제>의 아름다운 영상 속에서, 보편성을 추구하는 김용옥 철학의 많은 요소들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이러한 인식(느낌)을 바탕으로 나는 <서편제>의 미장센들에서 한국적 휴머니즘이나 '한'의 차원을 넘어선 일종의 보편성을 밝혀 보고자 한다. 즉, 판소리를 매개로 한 보편성의 추구인 셈이다. 이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 일단 김용옥이 저서 <아름다움과 추함>에서 전개한 몸각론과 판소리론에 대해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김용옥은 자신의 판소리론을 전개시키기 위해 우선 서양 근대 철학이 전제로 삼았고, 칸트 이래로 고착화되다시피 한 감성(Sinnlichkeit)과 오성(Verstand), 즉 감정과 이성의 구분이라는 이분법부터 부정한다. 그는 감정이라는 말 대신 원초적 포괄성을 지녔다고 보는 '느낌'이라는 말을 애용한다. 그에 따르면 "이성이나 오성도 '느낌'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김용옥(1989), <아름다움과 추함>, 서울: 통나무, 30쪽; 이하의 인용문은 모두 <아름다움과 추함>에서 인용한 것들이므로 그 쪽수만 기재하기로 함]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감각(sensation)이라는 말 대신 몸각(mom feeling)이라는 신조어를 쓰고 있다. 나아가 그는 "감각에 대한 몸각의 회복"[59쪽]을 주장한다. 물론 동양인도 감각을 중시한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그 감각 자체가 모든 몸 기관의 느낌의 역동적 통합태(dynamic unity)로서의 몸각"[59쪽]이며, "관념이나 오성 능력 그 자체가 몸각의 복합 형태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59쪽]. 결국 김용옥은, 인간의 몸을 통한 총체적 느낌(몸각)을 시각이나 청각 따위의 협소한 감각 기관으로 환원시키고 국한시킴으로써 굳이 오성과 구분하여 감성(감각)이라는 이름으로 축소시킨 서양 철학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이러한 독특한 사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말하는 '몸'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몸각이라는 단어에서의 '몸'은 단순히 인간의 몸(body)을 의미하지 않는다. 김용옥에 의하면, "몸이란 氣의 취산(聚散, 모임과 흩어짐) 과정에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어떠한 개방적 유기체적 단위이다."[67쪽] 이러한 정의는 그의 기철학(몸철학) 체계의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거니와 위의 인용을 좀더 설명해 보자면, "몸이란 전통적으로 동양철학에서는 '體'라는 말로서 표현되는 개념이며 '本體', '實體'…란 말처럼 이 몸은 분명 인간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통나무'라고 할 때도 '통'에는 몸의 개념이 들어가 있으며, '돌맹이'라고 할 때도 '맹이'에는 몸의 개념이 들어가 있다."[67쪽]

이러한 바탕에서 김용옥은 판소리를 기본적으로 시각이나 청각 중심인 서양 예술의 관점에서 보지 말 것을 당부한다. 판소리를 단순히 시각이나 청각의 예술로만 대한다면 정말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판소리는 '몸각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판소리를 귀로 듣는다는 것은 모독"[61쪽]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우리가 전통 음악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서구식 환경에 길들여진 우리의 몸이 몸각을 상실하고 감각(시각이나 청각이라는 지극히 말초적인)만을 발달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각의 회복이 판소리를 이해하는 첩경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서편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유봉 가족의 진도 아리랑 쇼트를 읽어 보면, 앞서 1장에서 임 감독이 얘기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의 인식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 잠시 이 쇼트를 머리 속에 떠올려 보자.

결코 길게 느껴질 수 없었던 이 롱 테이크 쇼트는 한적한 시골 풍경으로부터 시작된다. 구불구불한 흙길이 멀리 프레임의 오른쪽 위 비탈에서부터 시작되어 화면을 이등분하면서 이어지고 차차 관객 전면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그 적막함 속에 가벼운 회오리가 불면서 길 위에 흙먼지를 피어오르게 한다. 멀리 비탈길에 유봉 가족이 터덜터덜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유봉 가족의 도보 진행 속도는 진도 아리랑의 소리 가락에 맞춰 점점 빨라지는 듯싶다가 관객 전면으로 이어지는 길에 이르러선 흥겨운 춤에다 동호(유봉의 아들)의 북 장단까지 곁들여지면서 다시 완만해진다. 풍경 속에 인간이라곤 오로지 유봉 가족 세 명 뿐이지만, 그들의 소리는 프레임을 꽉 채우며 멀리멀리 풍경 안으로 퍼져 나간다. 그들은 관객 쪽을 향해 계속 덩실거리며 다가오고 점차 프레임에서 사라져 간다. 대개의 경우 인물이 프레임 아웃 되면 커트에 의한 쇼트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게 보통인데, 이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인물이 모두 사라진 뒤에 남은 텅 빈 공간이 한동안 동일한 화면 구도로 지속되는 것이다. 다시 적막해진 전원의 흙길에는 여전히 회오리를 따라 흙먼지가 감겨 올라가고 있다….

바로 이 마지막의 빈 공간 효과에 의해 비로소 진도 아리랑 쇼트의 몸각적 해석은 그 정당성의 최종적인 근거를 부여받는다. 물론 이러한 빈 공간의 연출은 고전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고, 또 이른바 아트 필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서편제>의 빈 공간은 그 성격상 이들 영화의 그 어느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다.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경우 빈 공간은 서스펜스 효과를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곧잘 이용되며, 아트 필름의 빈 공간은 관념 상태를 시사하기 위해 이용되기 때문이다. <서편제>의 빈 공간은, 인간이 프레임에서 사라진 후에도 계속 동일 화면을 보여줌으로써 그 초점을 인간을 포함한 전 우주적 '몸'으로 확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앞서 말한 김용옥의 몸 개념을 상기할 것). 자연(우주) 속에 내질러진 유봉 가족(인간)의 소리는, 마치 회오리에 의해 말려 올라가 대기로 확산되어 가는 흙먼지처럼 프레임 안의 자연 속으로 스며든다. 그리고 인간이 프레임에서 사라진 뒤에도 그 소리는 여전히 자연과 함께 남아 있는다. 기와 기의 공명이라고나 할까? 종국에 관객은 텅 빈 공간을 응시하면서 하나의 '느낌'만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해서, 몸각의 상호 작용을 통해 영상과 관객 사이에도 일종의 공명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김용옥은 "영상은 기의 무형태와 유형태의 통합이다"라는 표현을 그의 영화론이 전개된 저서 <새츈향뎐> 표지에 실음으로써 이와 비슷한 언질을 주고 있다. (앞서 1장에서 이미 나는 진도 아리랑 쇼트는 '빈 공간 효과'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얘기한 바 있다. 2000년 현재 입장에서 보자면 이 문단의 '빈 공간 효과'에 대한 찬양은 한 영화에 대한 과잉 해석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난 이제 '아트 필름'이라는 편협한 분류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실상 어떤 영화라도 소위 아트 필름이 될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 몸각(mom feeling)이란 용어는 철학자 김용옥이 자신의 기철학 체계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 낸 독특한 용어다. 몸각이란 용어가 최초로 사용된 예는 그의 저술 <아름다움과 추함>의 59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몸각론을 더욱 발전시켜 인간의 몸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킨 저술이 바로 <태권도 철학의 구성 원리>이다. 흔히 철학자 김용옥을 기인(奇人)이나 중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의 학문 세계의 진지성과 광대함은 이러한 오해를 깨끗이 불식시킨다. (2000년 현재, 김용옥은 EBS TV 강좌 '노자와 21세기'로 다시 한번 무대 전면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1993년 당시 난 그를 좋아했고 또 존경했지만, 이제 난 그를 좋아하지도 존경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의 학문 세계를 존중하고, 그를 더 잘 알기 위해 애쓰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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