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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편제 Seopyeonje>의 철학적 이해 4/4  

몸각론이라는 관점을 통해서도 보편성을 추구하려는 김용옥의 기철학 체계에 의거한 이상의 진도 아리랑 쇼트 읽기는 <서편제>에서 보편성을 찾아보려는 작업에 일종의 파편적 근거를 제공해 준다. 이 쇼트와 함께 또 다른 인상적인 씬에 의해 우리는 인류 보편적 인식틀의 한 형태를 확인할 수 있으며, 그 확인을 통해 우리는 또다시 김용옥의 기철학과 만나게 된다.

그 인상적 씬이란 유봉이 눈먼 송화를 줄에 연결하여 이끌고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소리를 부르는 씬이다. 이 씬의 각 쇼트 전환은 '계절의 순환'에 따른다. 유봉과 송화 부녀는 우중충한 봄의 하늘 밑을, 단풍 들고 낙엽이 깔린 가을의 숲길을, 그리고 눈이 펄펄 쏟아지는 겨울의 산길을 끊임없이 걸어간다. 이 와중에도 유봉의 소리는 단절됨 없이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그들의 여정이 멈춰진 곳은 나중에 소릿재 주막으로 알려지게 되고 유봉이 죽어 묻히게 될 그 폐가였다.

김용옥은 판소리를 "'느낌'의 구조로 파악된 희·비의 본원적 융합 형태"[89쪽]라고 본다. 이 말에서 '본원적'이라는 표현에 유념해야 하는데, 이는 그가 판소리를 단순히 희극과 비극의 복합 형태인 희비극(tragicomedy)으로 보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희극과 비극이라는 분화된 형태가 나타나기 이전의 원초적인 형태, 즉 희극이면서 비극이기도 한 미분화된 형태로서의 판소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원초적 형태로서 판소리를 파악하고 있는 그는, 결국 희비극의 문제가 "계절의 순환에 따른 '따님' 숭배 의식이라는 농경 사회의 생산성과 최소한 발생론적으로는"[89쪽] 관계가 있다고 언급하면서 판소리와 순환론을 결부시키는 작업을 시도한다. 즉, 곡물의 파종과 수확이라는 농경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봄의 탄생과 여름의 성장, 가을의 성숙, 겨울의 죽음, 그리고 다시 봄의 소생이라는 계절의 순환론적인 상징성과 결부된다는 관점에서 판소리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농경 문화와 순환론을 연결하는 이러한 사고 방식은 이미 종교학이나 민속학 같은 분야에서는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학계의 상식과도 같은 그런 위치에 서 있다. 그 단적인 예로, 이제는 종교학 분야의 고전이 되어 버린 프레이저(Sir J. G. Frazer)의 <황금 가지>에 벌써 이러한 논의가 자세하게 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고대 농경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신화 양식-예를 들면, 그리스 신화의 저승의 신 하데스가 페르세포네(곡물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를 유괴하는 이야기라든가 고대 근동의 바알 신화 따위-을 연상한다면 우리는 비교적 용이하게 계절의 순환과 이에 따른 자연의 소생과 죽음, 그리고 곡물의 파종과 수확과의 상관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과 부활'이라는 일종의 원형적 신화 양식이 계절의 순환과 결부되는 이러한 사고 방식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인류 보편적 인식틀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인식틀이 판소리에도 내재해 있다고 김용옥은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판소리를 가리켜 "판소리는 사계절을 다 가지고 있다 (Pansori has all four seasons)."[89쪽]라고 말한다. 바로 이 언급이 위에서 말한 <서편제>의 씬에서 극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씬에서 우리가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요소가 나오는데, 그것은 유봉에게 이끌려 가는 눈먼 송화의 모습이다. 눈이 멀어 버렸다는 사실은 어쨌든 간에 하나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유봉의 줄을 붙잡고 순순히 따라가는 장님 송화의 모습은, 마치 운명의 힘을 거역하지 못한 채 그 질곡을 짊어지고 가는 그리스 비극의 장님 오이디푸스를 떠오르게 만든다. 유봉은 이렇게 봤을 때 송화의 운명이 형상화된 것(더욱이나 송화의 눈을 멀게 한 장본인이자 아버지)에 다름 아니며, 송화가 붙잡고 가던 그 줄은 언제 끊어져 버릴지 모르는 연약한 인간의 운명을 상징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편제>의 송화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와 다른 점은 송화의 비극이 단순히 그리스적 비극(운명에 굴복하고 마는)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장님의 암흑은 곧 죽음과 공포, 그리고 고독의 세계를 상징한다. 앞서, 판소리에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화적 보편 양식이 희비극의 본원적 융합태로 내재해 있다는 말을 했었다. 장님이 된 송화가 운명의 힘에 이끌려 마침내 도달한 곳은 죽음의 정적만이 감도는 흉물스런 폐가였지만, 그 폐가에서 송화는 사실상 득음의 경지에 이르고, 그녀를 속박하던 운명의 상징인 유봉은 그 폐가에서 숨을 거둔다. 즉, 송화는 '일단' 죽음을 극복한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음이 부활로까지 연결되기 위해선 좀더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김용옥은 판소리 <춘향가>를 예로 들면서 우리에게 실제로 판소리가 어떻게 희비극의 융합태인가를 밝히고 있다. 즉, 죽음으로 상징되는 춘향의 하옥 후 어사또 출두에 의한 춘향과 몽룡의 재회는 "환생의 환희며 부활의 축복"[91쪽]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비극의 궁극적 의미는 카타르시스를 위한 주인공과 나의 슬픔이나 두려움이 아니다. 결국 이 '부활'과의 융합이며, 이것은 생명의 환희를 말하는 것이다. 삶의 생성(becoming), 그 자체가 아무리 애노의 추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궁극에는 기쁨과 힘이 깔려 있다"[91-92쪽]고 본다. 송화의 진정한 부활은 잠시 보류되다가 마침내 동호와의 재회를 통해 성취된다. 송화가 부르는 <심청가>의 대목은 그러한 성취의 기쁨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즉, 인당수에 몸을 던져 죽었다가 부활하여 황후가 된 심청은 아버지 심봉사와 재회하게 되고, 그 재회의 자리에서 심봉사 역시 암흑의 세계(죽음)를 벗어나 마침내 눈을 뜨게 되는(부활) 것이다. 암흑과 죽음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심봉사의 환희는 소리를 하는 남매의 눈물을 통해 승화된다. 그리고……

송화는 다시 줄에 이끌리어 정처 없이 길을 떠나지만, 줄로 그녀를 인도하는 존재는 더 이상 암울한 운명의 힘이 아닌 어린 계집아이의 넘치는 생명력이었다. 관객은 멀어져 가는 송화를 바라보며 그녀가 더 이상 고난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는 막을 내린다.

흔히들 <서편제>를 한국인의 한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고 그냥 넘겨 버린다. 하지만 이상의 논술을 통해서 제시했듯이 판소리를 형상화한 <서편제>는 한국인의 한을 한하다가 그냥 끝나버리는 비극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기쁨으로 막을 내리는 희비극의 '본원적 융합태'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보편성이라는 철학적 요소가 임권택의 <서편제>에 미학적인 형태로 녹아있음을 또한 발견하게 된다.


3. 글을 마무리하면서

"철학은 …인간의 문제를 논증과 비판을 통하여 제시하지만, 드라마(예술)는 그냥 기술할 뿐이며 제시할 뿐이다. 이렇다라고 자기의 통찰을 보일 뿐 논증과 비판을 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에 예술과 철학의 차이가 있으며 또 예술의 매력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양자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영역 내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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