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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 메이커 The Star Maker> 잡기장 1/3  
<스타 메이커 The Star Maker> 잡기장(雜記帳)

<시네마 천국 Cinema Paradiso>의 변주곡
영화란 얼마나 진실할 수 있는가?

이 글은 원래 1996년 5월, 필자가 회원으로 있던 PC 통신 천리안 영화 동호회 SCREEN의 한 게시판에 올렸던 것이다. 사상적으로 혼란스럽던 시기에 쓰여진 글이라 지금 와서 읽어 보니 역시 두서가 없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허둥대고 있다는 느낌이다. 은연중 영향 받은 인식론적 상대주의로 인해 냉소와 허무감 따위의 감정에 압도되어 있었던 탓일 게다. 이 글을 쓴 뒤로 필자는 오히려 하버마스에 대한 관심을 잃어 버렸다. 최근 우연한 기회에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을 읽으면서 그를 향한 애정이 되살아났지만, 그럼에도 계몽이 여전히 추구해야만 할 미완의 프로젝트인지 필자는 아직 잘 모르겠다. 불투명 속에서 투명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스타 메이커>를 만든 이탈리아의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은 <시네마 천국>이라는 영화로 더 유명하다. 따라서 -부제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이 잡기장은 필연적으로 <시네마 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1995년에 이미 필자는 '<시네마 천국> 삐딱하게 보기'라는 글을 써서 역시 같은 동호회의 게시판에 올린 적이 있다. 결국 이 잡기장은 1년 앞서 쓰여진 <시네마 천국>에 관한 필자의 글을 토대로 하고 있는 셈이다. 졸고 '<시네마 천국> 삐딱하게 보기'를 본 웹 사이트의 Misc. 섹션에 실어 놓았다. 참고하시기 바란다. 2000/06/18.

1.

이제 모더니즘이나 마르크스주의의 위풍 당당함은 역사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되었고, 이성에의 신뢰는 그야말로 실낱처럼 가느다란 희망에 기대 서서나 가능한 것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실존주의자들이 누렸던 여유와 낭만마저도 누릴 수 없을 정도로 삭막한, 그리고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이 거지 발싸개 같은 세상에 글자 그대로 내던져져 있다.

그래서일까? 얼마 전(1996년 5월) 한국을 찾은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 1929- )는 언론과 방송의 푸대접-나로선 이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을 받고 애당초 대중의 관심 영역 밖으로 밀려나 버리고 말았다. 만약 마이클 잭슨 같은 유명 엔터테이너가 공연차 한국을 방문하기라도 했다면, 단언컨대, 한국의 언론과 방송은 별의별 호들갑을 다 떨어가며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도하느라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비록 하버마스가 이제는 한물 간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상적 계승자로서의 네오 마르크스주의자이자 계몽주의적 이성에 기초한 의사 소통의 가능성을 믿는 철 지난(?) '이성의 옹호자'라고는 하지만, 그가 이처럼 한국에서 푸대접을 받은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한국의 언론과 특히 방송이 너무나도 무식하고 야만적이고 원시적이고 미개하고 어리석고 멍청하고 한심하고 저질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가 없다. 한국에 와서 보름 가까이나 머문 사람에게 출국 바로 전날 프레스 센터 건물 안에서 언론학자, 기자들과 간담회 자리 한 번 마련해 줬다 해서 그걸 대접이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엄청난 착각이다. 내가 무슨 하버마스'주의자'라거나 그의 추종자여서 이런 얘길 하는 게 아니다. 하버마스 같은 초특급 철학자라면 한국에서 결코 이 정도의 대접을 받는 데 그쳐선 안 된다. 우리는 진정한 권위를 너무나도 모르고, 또 권위에 대해 존중을 표하는 데 너무나도 인색하다. 천박한 평등주의나 판을 치고 있을 뿐.


2.

진실이라는 것도 결국은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문제로 환원되고 만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진실의 문제는 각 개인의 주관적 문제로 축소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이야기의 중심은 다름 아닌 인간 자신, 그렇게도 불확실하고 믿을 수 없는 나 자신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인간/나 또한 그나마 지키고 있던 그 중심의 자리로부터 언제 축출당하게 될지 모를 운명에 처해 있다.


3-1.

영화란 얼마나 진실할 수 있는 것일까? 도대체 영화가 진실을 얘기할 수나 있는 것일까? 과연 진실이란 뭘까? 영화가 진실을 제시할 수 있고, 나아가 영화가 진실일 수 있다고 확신/착각하는 작자들이 영화를 통해 제시하는 진실(?)이라는 것도 사실은 영화를 만드는 당사자들의 철학에 의해 재편성된 주관적 진실일 따름이다. 이렇게 제시된 주관적 진실을 관객은 그 결과야 어떻든 간에 자신의 주관에 의해 또 한 차례 '왜곡'시켜 받아들이는 불가피한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또다시 반복되는 얘기지만, 어떠한 영화 텍스트 해석이건 그 해석과 거기서 도출된 결론은 늘 개연성밖에는 확보하지 못한다. 만약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떤 영화를 두고 "이 영화야말로 진실을 얘기하고 있다. 이 영화야말로 진실 그 자체다"라고 확신에 확신을 거듭하는 관객은 가엾게도 주관적인 도취와 감격의 황홀경, 그리고 대단한 착각에 빠진 불쌍한 존재라고밖에 말할 수 없지 않겠는가?


3-2.

만약 객관적인 진실이란 게 영화적으로 포착 가능한 것이라는 망상에 젖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의 망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즉 자기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포착해서 관객에게 보여 주기 위한 가장 좋은 영화 형식으로서 역설적이게도 관객의 감성을 최고로 자극할 수 있는 선동 영화/데마 영화를 선택하라고 난 권하고 싶다. 여기에 최루적 요소가 가미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고.

이러한 견해가 지극히 보수 반동적인 것이라고? 절대로 그렇지 않다. 생각해 보라! 현대의 관객-물론 이 범주엔 '정상성'이라는 전제 조건이 요구되긴 하지만-은 어차피 영화가 영화일 뿐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관객에게 있어 영화란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의 전달 수단이자 한낱 그림자 놀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관객에게 진실을 보여주고 느끼게 해 주겠답시고 끊임없이 "이건 영화야, 영화라구. 이건 영화에 지나지 않는다구!"라면서 몰입을 방해하는 장치로 관객을 괴롭히는 영화를 만들어 제시해 봤댔자 관객은 냉소 어린 코웃음만 칠 것이 분명하다. 즉, "그래. 도대체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라는 식이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심각하지도 않고 심각한 채 하는 것조차 혐오하고 경멸한다. 따라서 몰입을 거부하는 영화 형식과 장치는 이미 시대 착오적인 과거의 유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1980년대 좌파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른바 '대안 영화'가 대안 구실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관객은 이야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니만큼 이해하기도 버거운 생소한 형식의 실험 또는 비장미로 감싼 이데올로기적 설교로 애써 관객을 괴롭힐 필요는 없다. 이야기가 주는 '재미' 가운데로 관객을 몰입시켜 자극을 가해 버리면 그만이다. 일단 자극을 가하는 데 성공만 한다면 그 이후는 만사 오케이다. 관객에게 있어 진실은 객관적 진실이든 주관적 진실이든 왜곡된 진실이든 조작된 진실이든 그 어떤 것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여기에 선동 영화/데마 영화 형식보다 더 좋은 '대안'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3-3.

사람'들'은 비겁하다. 그 내면 깊은 곳에 굴종적이고도 싶고 파시스트적이고도 싶은 요소/욕망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요소/욕망을 권력에 대한 열망과 결합시키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 중 하나가 매스 미디어의 장악과 조작이라는 점은 지극히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비겁한 요소/욕망에 자극을 가하고 불을 질러 이를 표출시킬 수만 있다면 진실(?)은 이내 먹혀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영화는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이건 영화가 아니야. 이건 사실이자 현실이요, 진리라고!"라고 속삭일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관객을 흥분시키고 열광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굳이 이 흥분과 열광의 감정을 실천의 단계, 즉 1980년대 식 용어로 표현해서 '혁명'으로까지 승화시키느라 고심할 필요는 전혀 없다. 혁명은 이제 그 타당성을 상실했고, 또 이미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사람'들'은 일단 발동이 걸리면 맹목적적이 되는 데다가 무식하고 비도덕적이라서 불가항력적으로 온갖 추태와 비극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오로지 말 잘 듣는 모범 학생일 뿐이다.


3-4.

영화를 통해 진실을 제시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작자들은, 그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주체할 수 없이 강력한 권력에의 열망/욕망을 진실이라는 미명으로써 합리화하고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너무나도 무지해서 자신의 권력에의 열망/욕망을 자각조차 못하고 있는 딱한 사람들일 따름이다. 결과적으로 진실과 권력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이 가련한 사람들은 우리의 니체(F. W. Nietzsche)를 통해 정신을 계발시킬 필요가 있다. 즉, 니체가 말한 권력 의지(will to power)와 군주 도덕(master morality)으로 스스로를 무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창조력'이다. 내 생각에 창조력은 애써 노력한다고 해서 터득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니체로 똘똘 무장하고 정신을 계발시켰다 하더라도 창조력이 없다면 진실/권력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이 되어 버리고 말 뿐이다. 따라서, 진실을 제시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권력욕에 이글이글 불타 오르고 있는 사람이나 니체 추종자 중에서 애당초 창조력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은 아쉽겠지만 에이젠슈쩨인(Sergei Eisenstein)이나 리펜슈탈(Leni Riefenstahl) 같은 사람들의 영화나 들여다보면서 위로를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스스로 창조력이 있다고 판단한 사람은 물론 이들 두 사람의 영화를 통해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나름의 대안을 제시받으면 될 것이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이들 두 사람의 영화는 지극히 영화적이고 예술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얼마나 선동적이고 데마적이고 자극적이고 최루적이고 감동적이고 감격적이고 나아가 황홀하기까지 한가? 진실은 곧 권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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