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영화 보기
 <스타 메이커 The Star Maker> 잡기장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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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시네마 천국 Cinema Paradiso>과 <스타 메이커 The Star Maker>의 감독 주세페 토르나토레(Giuseppe Tornatore)는,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만큼은, 중요성을 갖는다. 난 이제껏 비록 토르나토레가 만든 영화 중 겨우 두 편-<시네마 천국>과 <스타 메이커>-을 보았을 뿐이지만, 이 두 편의 영화들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그저 아기자기하고 예쁘기만 한 멜로 영화에 머물다 말아 버리지 않는다. 이 두 영화들은 노골적으로 영화라는 매체의 허구성, 영화의 비진실성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좀 심각하게 얘기하자면, 이 두 영화는 영화의 존재론적 허위성이라는 아주 근원적인 문제까지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영화는 셀룰로이드 필름에 복제된 이미지일 뿐, 그게 곧 물 자체(Ding an Sich)는 아닐 뿐더러 칸트(Immanuel Kant)에 따르면 물 자체 역시 우리의 인식 주관으로써는 결코 파악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우리가 보는 영화란 것은 결국 기계로 복제된 이미지들의 허상이 역시 또 한 차례의 기계 조작을 거쳐 우리의 망막에 와 닿음으로써 비로소 형성된 감각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감각 내용은 그 근원부터가 물 자체가 아니라 필름에 담겨진 허상으로서의 이미지에 불과하므로 설사 우리의 인식 주관이 이를 종합하여 재구성해냈다 하더라도 이는 현상(Phenomenon)조차도 될 수 없는 열등한 것일 수밖에 없음이 논리적으로 자명해진다. 어차피 물 자체계/본체계/이데아계를 파악한다는 게 도무지 불가능한 현상계에 우리가 매몰돼 있다고 볼 때, 이 현상계를 다시 한 번 복제한 것에 지나지 않는 '기계 복제된 이미지들로서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시작부터가 허위와 허구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므로 영화를 통해 진실을 제시한다거나 영화가 곧 진실일 수 있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개소리요 잡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난 시네마(cinema)의 번역어로서 한국의 '영화(映畵)'보다는 중국의 '전영(電影)'이 훨씬 타당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후자가 영화의 허위성/허구성과 그 기계적 메카니즘을 월등하게 잘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토르나토레가 나에게 일말의 흡족감을 안겨 주는 이유는 그가 영화의 존재론적 허위성과 비진실성을 일단 인정하고 들어가는 솔직함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가 온통 거짓에서부터 출발한다는데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영화를 통해 이 사악한 세상과 맞서 싸우고 진실을 쟁취하자는 식의 쓸개 빠진 개잡소리 따윈 결코 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그를 가리켜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칭찬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가 영화에 대한 애정 고백이라는 동어반복의 매너리즘에 빠져 버렸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또 다른 어떤 이는 그가 달콤한 최루성 사랑 얘기나 그럴 듯하게 포장해서 속삭여 댈 줄 아는 그렇고 그런 서정 시인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토르나토레는 네오 리얼리스트도 아니요, 매너리즘에 빠져 버린 것도 아니요, 그저 그런 서정 시인에 불과한 인물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멜로드라마라는 지극히 영화적인 이야기 방식을 차용하여 역으로 영화라는 매체의 허위성/허구성과 비진실성을 드러내는 데 더 골몰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1995년, 천리안 영화 동호회의 한 게시판에 '<시네마 천국> 삐딱하게 보기'라는 좀 유치한 제목의 글을 실을 때만 해도 난 토르나토레와 그의 영화에 대한 나의 이러한 견해가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후속작인 <스타 메이커>에서 토르나토레가, <시네마 천국>에서 들려주었던 얘기와 동일한 얘기를 변주해서 들려 주고 있음을 목격하게 되면서 나의 이러한 불안감은 곧 자신감으로 바뀌게 되었다. 즉, 나의 해석은 상당할 정도의 개연성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하긴, <스타 메이커>가 <시네마 천국>의 동어반복에 불과하다는 비판은 나름의 타당성이 있다. 그런데 <스타 메이커>를 <시네마 천국>의 동어반복이라고 본다면 동어반복치고는 꽤 심각한 동어반복이다. <스타 메이커>의 동어반복은 단순한 동어반복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변주곡으로서 한층 더 심화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그려지고 있는 인간의 욕망과 진실, 그리고 권력과의 상관 관계는 이전 작품인 <시네마 천국>에선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고 일종의 메타포로 감추어져 있었다. 게다가 중심 주제도 아니었다. 그러나 <스타 메이커>에선 바로 이 문제가 중심 주제로 부상한다. <스타 메이커>에서 감독은 새롭게 부상한 이 문제를 전작인 <시네마 천국>을 통해 이미 제기한 바 있는 영화의 허위성, 비진실성이라는 문제와 결부시켜 전개해 나가고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4-2.

일단 <스타 메이커>의 내러티브를 한 번 상기해 보자. 역시 무대는 <시네마 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이다. 1953년. 때가 때인만큼, 적어도 영화에서 묘사해 주고 있는 바에 따르면, 시칠리아 사람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이탈리아로 쏟아져 들어 온 헐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의 영화에 온통 넋이 나가 버린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 조의 말마따나 마을 거리엔 온통 영화에 환장한 미친 사람들만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전후(戰後) 고단한 일상의 삶으로부터의 도피, 환상, 꿈, 욕망… 뭐 이런 것들이 시칠리아 사람들에겐 영화라는 매체와 단단히 결합돼 있다. 애당초 허구인 영화는 그 성격상 인간의 비현실적인 온갖 욕망과 일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주인공 조 모렐리가 사람들의 꿈을 실현시켜 주기 위해 낡아빠진 영화 장비를 실은 고물 트럭을 타고 화려하게 등장한다. <자전거 도둑 Ladri di Biciclette>(1949)을 만든 그 유명한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 1902-1974) 감독과 친숙한 사이이자 미국 유니버설 스튜디오 로마 지사의 스카웃 담당자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돌아다니는 그는, 일상의 삶이 가져다 주는 권태와 절망에 지친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는 해결사요, 고백 성사를 주관하는 신부요, 심지어 사람들의 정신을 치료하는 정신 분석의이기조차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의 낡은 무비 카메라 앞에 앉아 유료 오디션을 받으면서 어느새 자신의 내면 깊숙히 감추어 놓았던 은밀한 욕망과 치부, 나아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마저 고백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조는 철저한 거짓말쟁이에다 사기꾼이요, 전과자요, 사람들의 환상/꿈/욕망을 조종하고 지배하려 한 못된 권력자였을 뿐이다. 게다가 조의 무비 카메라는 목소리만 겨우 녹음되는데 지나지 않는 엉터리 장비였다.

사람들의 진실을 담보로 한 사기의 결과는 참혹한 심판. 정체가 탄로난 조는 죽도록 얻어맞고 형무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조의 연인이자 영화라는 비상구를 통해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꾀하고자 했던 배우 지망 소녀 베아타는 정신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어 버리고….


4-3.

토르나토레 감독은 영화의 신기루와도 같은 허상, 거짓, 비진실성 따위를 주인공 조의 사기꾼으로서의 캐릭터와 결부시키려 한 것 같다. 사기꾼 조의 엉터리 무비 카메라/온통 거짓으로 가득 찬 존재론적 허위로서의 영화에 애당초 진실-비록 시칠리아 사람들의 욕망으로서의 주관적 진실에 불과하지만-이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허구인 영화에의 지나친 탐닉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실/현실/진실-비록 물 자체는 될 수 없지만-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이 <시네마 천국>에 이어 또다시 이 영화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즉, <시네마 천국>의 두 주인공 알프레도와 토토가 지나치게 영화에 탐닉한 결과 두 눈을 잃거나 연인을 잃어버리고 말았듯이, <스타 메이커>의 두 주인공 조와 베아타 역시 연인을 잃거나 아예 한 걸음 더 나아가 미쳐 버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베아타의 정신 병원행은 상당히 드라마틱한데, 이는 이 영화의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 할 수 있다. 거짓이요 허구의 세계인 영화가 제공하는 팬터지 가운데서 살아가려는 사람, 즉 영화에 환장한 혹은 영화에 미친 사람은 결국 정상적인 현실의 세계로부터 도피할 수밖에 없으며, 글자 그대로 미침으로써만이, 다시 말해 체계적인 망상으로 구축한 자신의 세계 속에 안주함으로써만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베아타는 화려한 은막에의 꿈이 허무하게 무너져 버리자 이를 보상키 위해 망상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것이다. 출감한 조가 베아타와 재회한 자리에서 그녀의 이러한 망상을 굳이 무너뜨리려 하지 않은 것은 어떤 의미에선 현명한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망상은 그나마 그녀의 실패한 삶을 지탱해 주는 원천이 되고 있으니까.

이러한 점에서 내가 전에 <시네마 천국>으로부터 도출한 결론 - "사람들이여, 너무 영화 좋아하지 말라!"라는 명제는 <스타 메이커>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유효한 명제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스타 메이커>는 <시네마 천국>의 동어반복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타 메이커>는 이 동어반복으로부터 다시 새롭게 출발한다.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권력과 욕망과 진실의 문제라는 것으로부터.

시칠리아 사람들이 각자의 가슴 속 깊숙히 간직해야만 했던 혼자만의 비밀-진실. 고이 간직됐을 때에는 언제까지고 아름다운 진실이었을 이 혼자만의 비밀은 조의 엉터리 오디션을 거치면서 지저분한 욕망으로 변질되고 만다. 그리고 이 욕망은 권력 의지(will to power)에 다름 아니다. 권력 의지란, 비밀-진실을 욕망의 대상으로 대상화시켜 그 대상을 획득하고자 하며, 이렇게 하여 획득된 힘을 통해 모든 것(anything)을 지배하고 정복하려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제 진실은 진실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의 욕망/권력 의지를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의 진실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획득하고자 했던 힘/파워는 너무도 허망하게 탈취당해 버린다. 조 모렐리의 사기꾼으로서의 캐릭터가 암시하고 있듯이, 욕망/권력 의지의 발판이자 원동력인 영화는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는 허구이자 허위이기 때문이다. 모래 위에 세운 집은 금방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 이 법칙은 예외가 통하지 않는 아주 냉혹한 것이어서 주제넘게 타인의 권력 의지까지 조정하고 지배하려 들었던 조 모렐리의 경우엔 한술 더 떠 아예 파멸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이상에서 설명한 모든 심각함(?)들이 토르나토레의 영화에선 전혀 심각하지 않은 멜로드라마로 포장돼 있음으로 해서 감독은 특정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무슨 순회 전도사 같은 거북한 입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멜로드라마라는 케케묵은 형식으로도 어느 정도까지는 심각한 얘기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한 셈이라 볼 수 있다. 물론 크게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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