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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네트의 익명성 혹은 천국의 열쇠?
RL보다 VR의 가치를 더 옹호하는 일부 네트의 전도사들, 이른바 디제라티(the digerati)들이 인간의 육체를 '고깃덩어리'로 비하하고 나아가 육체의 불결함과 그 건사를 위한 노력을 저주하는 의사(擬似)
플라톤주의자들인 이유는 아마도 RL에서의 실존적 어려움과 육체의 한계를 통감하고 그 20세기적 구원의 통로를 네트에서 발견한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들에게 있어 네트는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의 세계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천국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RL과 VR을 철저히 구별하는 이원론자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RL에 자신의 뿌리가 있음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非이원론자들에게 있어 네트는 결코
구원의 길이 될 수 없음이 자명하다. 네트가 곧 천국이라는 디제라티들의 선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 네트란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며, 파괴해야 할 사악하고 음탕한 '바빌론'일 따름이다. 네트가
누군가에게 있어 환희의 천국이 될 것인지 혹은 쾌락과 고통의 범벅인 바빌론이 될 것인지의 여부는 적어도 현재까지는 전적으로 각자의 선택과 결단 여하에 달려 있다. 이러한 점에서 디제라티들의 선포는,
구원이란 전적으로 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개신교도들의 확고한 신앙 체계와는 달리 아직까지는 뚜렷한 종교적 허점을 안고 있다.
우리 웹진의 구성원들이 디제라티의 과격한 노선을 덮어놓고 맹종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웹진영화>가 네트를 부유하고 있는 이상 이들 디제라티의 의사 플라톤주의적 노선을 일종의 작업
가설로 수용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사실 VR과 RL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VR에 실재적 가치를 부여하는 이들 디제라티의 이원론적 노선은, 우리 각자가 VR과 RL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존재론적 해리 상태를 극복할
만한 정신력만 충분하다면 네트 상에서 아주 유용한 도구로 이용할 수 있다. 우리가 애초부터 우리의 실명(實名)을 숨기고 가명, 곧 화신(avatar)을 내세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웹진에서만큼은 RL에서의
개성과 정체성을 완전히 포기하고, 오로지 네트에서만 존재할 따름인 각자의 화신에 충실해 보자는 것. 이렇게 본다면 RL과의 의식적인 해리를 위한 전제 조건은 우리 각자의 '이름'을 바꾸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RL과의 완벽한 단절을 바란다면(즉, 네트라는 천국의 문이 열리기를 바란다면) 이름 바꾸기라는 의식(儀式)이 선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름 바꾸기 입문 과정을 거쳐 도달한 해리
상태 하에서만 비로소 나는 네트의 'Pinhead'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이제 RL의 나는 삭제되고, 네트는 RL과 완전히 분리되어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게 되며, 그 속에서 나는 'Pinhead'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RL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네트의 익명성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의미할 뿐이겠지만, 네트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존재론적 당위요, 일종의 요청이다. 결국 우리가 RL의 우리 자신을
철저히 숨기는 것은 우리의 무지나 컴플렉스를 감추기 위한 비겁함의 발로가 아닌 것이다. 그저 네트라는 공간에 충실하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일 따름이라는 점을 알아주기 바란다.
'RL은 RL'이고 '네트는 네트'다. <웹진영화>는 RL이 아닌 네트라는 공간에서만 존재하는 잡지다. 따라서 <웹진영화>의 구성원들 역시 결코 RL의 존재이어서는 안 된다는 이념적 요청이 충분히
제기될 수 있으며, 우리 구성원들은 이 요청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본다. 그러나 존재론적 해리 상태로 인해 고도의 정신적 긴장이 요구되는 이 요청을 웹진 구성원 전부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건
네트의 무정부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생리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행위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는 창간 이래 모두 이 요청에 대해 암묵적인 합의를 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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