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cellany
 on PHILOSOPHY 세계관으로서의 다위니즘에 관한 논고 - 2/10  

2. 세계관으로서의 다위니즘

우리는 본격적인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세계관 내지 패러다임이 무엇인가를 알아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리프킨(Jeremy Rifkin)은 그의 흥미있는 저서 <엔트로피 Entropy>에서 세계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인류는 온 역사를 통해 생활의 거점을 구축하기 위한 이론을 언제나 탐구하여 왔다. 바꾸어 말하면, 일상 생활에서 체험하는 여러 가지 의문에 해답을 내리기 위한 통일된 이론(세계관)을 갖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어느 사회에나 반드시 존재하였고, 또 그것이 그 사회의 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되어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세계관이란 '의도적'으로 만인의 합의에 의해 창출되고 확립된, 흡사 과학 이론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일반인은 세포 안에 DNA가 있으며 이것이 정보 전달과 유전의 본체라는 견해를 '그냥' 믿는다. 세포 안에 DNA가 있다는 것을 실제로 확인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세포가 정보 전달 기능을 갖는다는 관점이라든가, 생명체를 '그의 유전자 안에 담겨있는 정보의 다발로 인식하는' 이른바 정보학파(Informationism)의 관점은 195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아주 생소한 개념이었다]. 물론 리프킨이 이와 같은 의도로 기술한 것은 아니겠으나, 적어도 세계관이 한 사회의 '묵시적'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쿤이 과학사에서 말하는 패러다임도 바로 이와 같은 성격을 갖는다. 그러므로 패러다임이란 영원불멸의 진리일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여하간에 이러한 세계관이 갖는 가장 경계해야만 할 사실은, "세계관이 어린 시절부터 내재화(內在化)됨으로써 인간들이 거의 모두 한 사회의 세계관에 의해 자신들의 행동과 사고가 어떠한 규제를 받고 있는지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세계관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해 비교적 조리 있게 요약한 사람이 슈마허(E. F. Schumacher)이다. 그는 자신의 책 <작은 것이 아름답다 Small is beautiful>에서 19세기 때부터 유래하여 지금까지 '교육받은' 사람들(여기에는 서구식 가치관의 영향을 받고 있는 우리 한국인도 포함된다고 보아야 한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6가지 주요 관념들을 열거하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진화의 관념(진보라는 관념의 또 다른 표현) / 경쟁, 자연선택, 적자생존의 관념(진화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것) / 인간 생활의 고차원적 표현(종교, 철학, 예술 등)에 대한 두 가지 해석 - 마르크스적 해석(인간 두뇌 속의 환영에 불과하며, 물질적 하부 구조 위에 떠 있는 가변적인 상부 구조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인간 역사는 모두 계급 투쟁의 역사라는 관념)과 프로이트적 해석(잠재 의식의 어두운 움직임으로서 성장 시기의 충족되지 못한 근친상간의 욕구의 결과라는 것) / 상대주의 관념(모든 절대적 진리를 부정) / 실증주의 관념(자연과학의 방법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만이 확실한 근거를 가진다는 생각).

슈마허에 따르면 이들 6가지 관념들이 진리의 중요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부분적인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이 보편성(universality)을 주장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들에 대한 수많은 실제적 연구가 행해졌지만, 그 어느 것도 확실하게 입증된 바 없는 비경험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슈마허는 이들 관념이 19세기 선조에게는 지적(知的) 발달의 결과에 불과했으나, 20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운명의 지배자가 되어 버렸다고 비관조로 말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다음의 인용에 수긍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노력만으로 조화를 추구하게 될 때에는, 피조계 중에서 어떤 특정 부분만을 절대화시키는 일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나머지 부분을 도외시하고 절대화된 그 특정 부분은 하나의 '-ism'이 되어 자기 자신의 인식론적 종합의 기저(基底)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는 우리가 학문이나 그 무엇을 함에 있어서도 넘을 수 없는 마지막 한계라 하겠다. 이제 우리는 다위니즘이 등장하기까지의 역사적 경로를 간단하게 살펴볼 때가 되었다.

오늘날 서구인과 서구식 교육을 받은 동양인들을 좌우하고 있는 가장 원초적인 세계관은 거슬러 올라가면 뉴턴(Issac Newton, 1643-1727)의 '기계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슈마허의 6가지 주요 관념도 알고 보면 이 기계적 세계관의 일부 또는 산물에 지나지 않은 것들이다. 이 세계관의 시발점은 대개 중세 유럽의 붕괴기로 알려져 있는 14세기부터 일기 시작한 르네상스(Renaissance)의 휴머니즘 운동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이 휴머니즘 전통은 과학과 이성의 시대인 18세기에 통칭 '계몽주의(啓蒙主義) 사상'으로 계승됨으로써 기계적 세계관의 실질적인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계몽주의의 팽배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정신 풍토로 구축되어 있던 중세 유럽(물론 여기에는 로마-헬레니즘 문화의 파편과 게르만, 아랍의 이교 문화가 섞여있긴 했지만…)의 마지막 잔재를 일소해 버리고, 전(全) 유럽의 지적 배경을 모조리 바꾸어 놓았다. 즉, 초자연적인 것을 배제함으로써 인간의 시야를 그 이성(理性) 안에 가두어 버리는 한편, 기독교의 미래 지향과 소망이 어우러진 '천년왕국주의(千年王國主義)'에서 하나님 개입 신앙을 제거함으로써 낙관적인 진보 사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뮐만(Wilhelm Muhlmann)의 표현을 빌어 달리 말하자면, "진보라는 관념은 천년왕국적 직관(直觀)이 세속화한 형태"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2001년 註: 뉴턴 역학보다는 데카르트 철학이 후대의 정신사에 더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오히려 뉴턴 역학은 신비주의라는 반동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며, 중세 철학의 플라톤주의적 잔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수구(守舊)' 이론이다. 그리고, 현대의 역사학자 중에는 계몽주의의 영향력이 그간 지나치게 과대 평가되어 왔다고 보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 그들은 계몽주의가 교회를 쇠퇴시킨 것이 아니라, 반대로 교회의 쇠퇴가 계몽주의 보급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고 얘기한다.]

세상이 무한히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한다는 사고 방식은 뉴턴식 세계관의 주요 구성인자 중 하나이다. 이 진보의 신화는 18세기 유럽의 혁명기를 거치는 동안 잠깐 주춤했으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다시 부상하게 된다. 어쨌거나 진보 사상의 맥은 휴머니즘의 전통과 더불어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 '목적론적 세계관'과 결부되어 헤겔(Georg W. F. Hegel, 1770-1831)의 관념론이나 그 아류인 마르크스주의를 낳게 되고, 산업혁명과 제국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생물학적으로는 다위니즘이라는 형태로 화려하게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위니즘은 현재 어떤 이유로 진화론이라는 하나의 도그마로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일까? 사실상 당사자인 다윈 본인이 결단코 생물학 이외의 영역에는 적용시키기를 거부했던, 말하자면 생물학이라는 자연과학의 작은 영역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진화론이 현대의 모든 지적 영역에 파급되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근대 과학 혁명기를 거친 과학이 앞서 언급한 낙천적 진보 사상과 결합되면서 일종의 '과학주의(Scientism)'에 빠지기 시작한 무렵 (다위니즘-진화론이) 딱 알맞게 등장하여 뉴턴적 세계관의 또 다른 기둥이 되는 동시에, 뉴턴적 세계관을 보다 정교히 한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기존의 세계관에 끼여든 진화론은 보다 정교해지고, 보다 다듬어졌으며, 현대가 제아무리 발달된 과학 문명을 자랑한다 할지라도 그 근간은 거의 일 세기에 걸친 진화론 철학의 산물이며, 그 지배 하에 놓여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현대의 대표적인 창조론 과학자 헨리 모리스(Henry M. Morris)는 그의 한 저술에서 진화론 패러다임이 오늘날 얼마나 깊은 영향을 끼쳤는가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더욱이 진화론의 신봉은 생물학자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천문학자들은 우주가 계속 진화하고 있는 중이라 믿으며, …지질학자는 진화를 지구의 역사를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물리학자와 화학자들까지도 화학적 원소와 분자들이 기본 입자들로 진화됐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진화의 개념이 물리과학과 생물과학에 널리 유포되어 있다면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에서는 그 영향력이 더욱 클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매일매일의 사고와 활동에 직접 충격을 주는 것도 이 인문ㆍ사회과학 방면의 연구 분야이다. 사회학, 심리학, 경제학, 문학, 예술 등 이들 학문과 다른 인문과학이 우리의 매일매일의 관심과 결정, 우리의 도덕과 레크리에이션 문제에 직접 영향을 끼친다."

약간 긴 인용이 되었지만, 그만큼 진화론은 우리의 정신적ㆍ육체적 활동에 막강한 위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모리스뿐만 아니라 진화론자들도 이러한 세계관으로서의 진화론의 위치만큼은 기꺼이 인정하려는 반응을 보인다. 진화론의 강력한 옹호자인 생물학자 줄리안 헉슬리(Julian S. Huxley, 1887-1975 ; 토마스 헉슬리의 손자. 토마스 헉슬리는 다윈의 공식 대변인임을 자처까지 하면서 다위니즘을 맹렬히 지지했던 인물임)는 다음의 인용문에서 진화를 단순한 과학 이론의 수준으로부터 포괄적인 하나의 철학으로까지 승화시키고 있다.

"모든 실제는 진화한다. …진화는 시간을 따라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일방적인 진보 과정이다. 곧, 이 진화는 일원적이며, 계속적이고, 역행할 수 없는 과정이다. 또한 자기 변형을 하며, 그 변형을 통해 다양성과 새로움을 가져다 주는 과정이기도 하다.

…진화론적인 사고 방식에 있어서 이제는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필요나 여지가 더 이상 없다. 지구는 창조되지 않고 진화되었다. 그 안에 서식하고 있는 모든 동물과 식물들, 두뇌와 신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간적 자아들, 마음과 영혼도 진화되었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원자들과 별들로부터 물고기와 꽃들에 이르기까지, 물고기와 꽃들로부터 인간 사회와 가치들에 이르기까지 실제의 모든 양상들은 진화에 종속하고 있다. -참으로… 모든 실제는 진화의 단순 과정이다."

이쯤 되면 철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신념 내지 신앙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이러한 신념이 교육계에까지 파급됨으로써 진화의 개념이 교과 과정, 특히 과학 교육의 기본 전제가 되고 있음은 굳이 외국을 예로 들 것도 없이 우리나라 초ㆍ중ㆍ고ㆍ대학 과정의 과학 교과서를 잠깐 들춰보기만 해도 곧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으로써 다위니즘과 진화론에 대한 전반적인 배경과 세계관으로서의 역할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셈이다. 제3장에서는 세계관 내지 패러다임으로서의 다위니즘이 어떤 이유로 제국주의와 공산주의의 논리에 흡수될 수 있었는가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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