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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은 1809년 2월 12일, 영국 잉글랜드에 위치한 슈루즈버리(Shrewsbury)에서 의사였던 로버트 워링(Robert Waring Darwin, 1766-1848)의 5번째 자식이자 2남으로 태어났다 [2월
9일이 출생일이라는 설도 있지만, 다윈의 자서전에는 2월 12일로 돼 있다]. 개업의였던 로버트 워링은 극히 현실적인 인물로서 의사로는 성공한 케이스여서 찰스 다윈은 어린 시절부터 생계 걱정을 할 필요 없는
유복한 삶을 살아갔으며, 심지어 어른이 된 뒤에도 부친이 물려준 유산 덕택에 평생을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말하자면 당시 영국의 전형적인 부르주아지였다. 뜻밖에 74세라는 장수를 누렸음에도 병약한 체질
때문에 평생을 고생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다윈으로선 이보다 다행스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다윈의 개인 내력 서술은 이쯤에서 그만 두기로 하자. 논점은 다윈의 프로필보다는 그의 출생을 전후로 한 시대 상황에
맞춰져야 하겠기 때문이다.
다윈은 대륙보다 약 1세기 앞선 18세기 후반에 발생한 자생적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자본주의가 강화됨으로써 이른바 '상업 자본주의'에서 '산업 자본주의' 단계로의 이행 과정에 있던 19세기 초엽의
영국에서 태어나, 산업 자본주의가 완전한 성숙 단계에 이르는 '빅토리아(Victoria; 대영 제국의 여왕으로 재위 기간은 1837-1901년) 시대'에 모든 지식 활동을 전개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다윈이 활동했던 시기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다위니즘의 출현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이후 전개되는 제국주의ㆍ공산주의와 다위니즘과의 상관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다윈이 구상하고 완성한 진화론은 절대 다윈이 순수하게 자연만을 관찰함으로써 얻어진 결과는 아니었다.
대개의 경우 다윈이 진화론을 제창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영국의 해군 측량선인 소형 군함 비글(H.M.S. Beagle; H.M.S.란 His [or Her] Majesty's ship의 약자로서 '영국 군함'이라는 의미임)
호에 박물학자의 자격으로 승선하여 [비글 호의 공식 박물학자는 따로 있었으며, 다윈은 단지 함장의 말벗이 되는 조건으로 승선했다는 강력한 이론(異論)이 제기되고 있다] 1831년부터
1836년까지 5년 간을 자연과 더불어 항해하던 시기에, 특히 남아메리카 브라질 근방 태평양에 위치한 화산섬 갈라파고스 군도(Galapagos Archipelago)에서의 '순간적 영감' 때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과학사를
대할 때 흔히 발생하는 지극히 낭만적인 상상력 내지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비록 다윈이 종의 변화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이 항해 기간 중이었는지 모르지만, 그가 이후 자신의 생각을 이론으로 전개해
나간 과정이라든가, 심지어 항해 중 종의 변화에 주목하게 된 계기까지도 단순한 관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상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윈의 발상에 모델이 된 것은 '공식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공식적'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근래의 연구에 의해 비공식적인 요인들-주로 심리적인-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짤막한 논의는 굴드의 <다윈 이후>를 참조할 것]. 라이얼(Charles Lyell, 1797-1875)의 <지질학
원리 The principles of geology>(3 vols., 1830-33)와 맬서스(Thomas R. Malthus, 1766-1834)의 <인구론 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1798)이 그것이다. 다윈은 이 두 저술을 정독하는 가운데, 이 두 책을 큰 획으로 하여
점진적 변이, 진보, 생존경쟁, 자연선택 등의 생각을 구체화시킬 수 있었다. 다윈은 시기상 라이얼의 저술을 맬서스보다 앞서 접했으므로 라이얼과 관련된 부분을 먼저 논의해 보기로 한다.
라이얼은 원래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변호사였으나, 후에 지질학으로 전향한 인물이다. 그러한 그가 균일설(均一設, Uniformitarianism), 즉 동일 과정설의 대중화에 가장 큰 공헌을
함으로써 18세기 한 세기 동안 가장 유력한 지질학 이론이었던 격변설(激變設, Catastrophism), 즉 대홍수 이론을 퇴조시키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윈,
라이얼, 맬서스는 모두 처음부터, 그들이 매진했던 분야인 박물학, 지질학, 경제학의 전문 인력은 아니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다윈은 목사 지망생이었고, 라이얼은 변호사였으며, 맬서스는 성공회(聖公會)
목사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해당 전문 분야에서의 국외자였던 셈이다. 그러한 그들이 각 분야에서 20세기 이론의 선구자가 되었다는 것은, 학문의 발전은 언제나 국외자가 촉발제 역할을 했다는 저널리스트 쎄람(C.
W. Ceram)의 말을 다시금 상기하게 만든다].
다윈이 라이얼의 <지질학 원리>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케임브리지 대학 신학부 시절(1828-1831년) 사귄
식물학 교수 헨슬로(John S. Henslow, 1796-1861) 덕택이었다. 헨슬로는 다윈이 비글 호에 승선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준 인물인데, 다윈이 출항할 때 <지질학 원리> 제1권을 주었던 것이다. 1832년에 출판된 제2권은 같은 해
다윈이 남아메리카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Montevideo)에 있을 때 헨슬로가 보내 왔다. 다윈은 항해 기간 동안 줄곧 라이얼의 책을 탐독하면서 점차 균일설로 기울어졌다. 그리하여 상륙할 때는 언제나 "라이얼의
책을 가이드북으로 가지고 다니며 지질 조사를 하여 지질학상의 균일설에 대한 신선한 확증을 얻었다." 우리는 다윈이 진화론을 제시한 인물로만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단순히 생물학자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가 비글 호 항해 기간 중 과학자로서의 첫발을 내디딘 분야는 지질학이었으며, 종의 진화에 착안하게 된 것도 사실은 이 지질학, 특히 라이얼의 영향이 컸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는
다윈이 귀국 직후인 1836년 11월, 라이얼의 추천으로 지질학회 회원이 된 사실이라든가 후에 라이얼이 다윈의 사상적 맹우(盟友) 중 한 사람이 된 사실, 다윈이 산호초와 화산도에 대한 저술을 남겼다는 사실로써
입증된다. 특히 "산호초의 기원에 관한 그의 통찰은 이 문제에 대한 오늘날의 견해의 기초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우수한 것이다. 더욱이 <종의 기원>에서도 상당 부분을 지질학
논의에 할애하고 있으며, 특히 초판의 경우 총 14장(章) 중 두 장이 지질학에 관한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다.
다윈이 최초로 본격적인 지질학 교육을 받은 것은 케임브리지 대학 신학부 학사 자격 취득 시험에 통과한 직후인 1831년 8월의 일이었다. 이 역시 헨슬로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는데, 케임브리지의
지질학 교수 세즈위크(Adam Sedgwick, 1785-1873)의 북부 웨일즈(Wales) 지방 지질학 연구 여행에 동행한 것이 그것이다 [세즈위크는 고생대 지층의 세 기, 즉 캄브리아기, 오르도비스기,
실루리아기를 확정한 인물로 라이얼의 균일설에는 반대했던 격변론자였다. 창조론자였던 그는 훗날 다윈의 이론에 반대하여, "이런 학설이 온 세상에 퍼지는 것은 도덕적으로 두려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 여행을 통해 다윈은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비글 호 항해시 지질학 연구가 가능했던 것도 이 여행 덕택이 컸다고 한다. 아무튼,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긴 해도 전통적인 계시 신앙에 큰
부담을 느끼지는 않았던 신학도(神學徒) 다윈의 신앙관이 항해 이후 무신론으로 급변하고 노년에는 마침내 불가지론에 도달하게 된 데에는 물론 본인의 책임이 크지만, 무엇보다도 비글 호 항해시 라이얼의
균일설이 큰 역할을 했다고 여겨진다. 흔히들 비글 호 항해가 없었다면 다위니즘도 없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이런 의미에서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다윈은 라이얼 학설의 어떤 면에 주목했던 것일까? 이에 앞서 우리는 균일설이 대두하기까지의 과정을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는 과거를 여는 열쇠'라는 말로써 곧잘 표현되곤 하는
균일설은 결코 라이얼이 처음으로 주장했던 것은 아니었다. 근대 지질학의 역사는 구약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전 지구적 대홍수 기록과 무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흔히 교회의 역사와 비교되어 왔다. 16, 17세기에
계몽주의가 성행하면서 이와 더불어 신앙 역시 합리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압력이 밀려왔고, 이에 따라 인간 이성 안에서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자연 신학이 재등장하였다. 이는 뉴턴식 기계적 세계관의 기독교적
변형태인 이신론(理神論, Deism)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 이신론의 영향으로 16-17세기에 균일설이 어느 정도 옹호됐던 것은 사실이나, 18세기의 대부분은 대홍수 이론에 입각한 격변설이 지구의 지질학적 상태를
설명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으로 유지되었다. 이런 이유로, 균일설을 주장함으로써 라이얼의 선배 격이 된 프랑스의 뷰퐁(Georges L. L. Buffon, 1707-1788)이나 영국의 허튼(James Hutton, 1726-1797) 등의 주장은 당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자 사태는 달라졌다. 영국의 경우는 18세기에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등의 인물들에 의해 일어난 복음주의 신앙 부흥 운동으로 인해 청교도 혁명에 대한 반발로
등장했던 이신론이 점차 퇴조하는 단계에 있었으나, 대륙은 반대로 이신론 철학이 계몽주의 사조에 흡수되는 한편,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19세기에
접어들자 신학적인 면에서 전반적인 이성주의의 팽배로 성경의 권위가 실추하게 되었다. 결국 균일설에 기초를 둔 다위니즘이 1859년, '종의 기원'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게 되었을 때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교회의
많은 성직자들도 자연스럽게 이 혁명적인 견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세기는 비록 엄청난 선교 확장으로 세계 도처에서 종교적 부흥이 일어난 시대이긴 하지만, 반면 완전한 무신론이 나타난
시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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