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cellany
 on PHILOSOPHY 세계관으로서의 다위니즘에 관한 논고 - 10/10  

   후기 - 2001년

이 논문은 대학교 4학년이던 1989년 늦가을에 완성하여 이듬해 봄, 학과 학회지 Microbial  epoch  제4호에 실었던 것이다. 당시 필자의 과학사(科學史)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크리스천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함께 반영된 글이다. 지금 읽어 보면 여기저기 부족한 점들이 눈에 많이 띄고 또 독창적인 연구 결과라 볼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본 논문은 대학 시절 내내 주 관심의 대상이었던 진화론과의 씨름을 통해 얻은 잠정적 결론이라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각별한 의미가 있다.

사실 필자의 진화론에 대한 시각은 1989년 당시나 10여 년이 지난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진화'란, 소위 '엄밀한 과학적 사실'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지난 10여 년 간 필자의 학문적 시야가 넓어진 만큼 이 논문에서 전개했던 상당수 관점들을 이제 더 이상 그대로 수용할 수 없게 되었음에도(특히, 사회 구성주의적 시각에서 서술한 제4장의 편향된 과학관)- 진화라는 개념에 대해서만큼은 여전히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훨씬 부정적이 되어 버렸다.

논문을 쓰던 10여 년 전, 필자는 진화론의 대안으로서 성경적 창조론, 그 중에서도 이른바 '창조과학'을 선택했다. 미국의 개신교 근본주의에 뿌리를 둔 창조과학 운동은 필자가 보기에, 한국이 미국 다음으로 -어쩌면 미국보다 더- 큰 성과를 거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지난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국내에서 상당한 주목을 끌었다. 오히려 창조과학 운동으로 인해 진화론이 새삼 재조명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개신교의 맹렬한 팽창이 한풀 꺾인 지금, 창조과학 운동 역시 과거와 같은 활기를 찾아볼 수는 없게 되었다. 그리고 필자도 시간이 흐르면서 창조과학이 갖는 이런저런 문제점과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창조와 진화라는 사고 방식 사이에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창조와 진화는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이질적'인 것이다. 종교와 과학의 투쟁 내지 대립이라는 구태의연한 명제로 이 부조화를 설명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창조와 진화가 이원론적으로 대등한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진화론은 그저 하나의 '가짜 과학(pseudoscience)'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거대한 거짓말이라고나 할까? 혹은 이 시대가 묵인하는 새로운 신화 체계라고나 할까?

지금도 여전히 일부 자연과학자나 기독교 신학자들은 창조와 진화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으려는 시도를 계속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시도는 그냥 시도로 끝나고 말 것이 분명하다. 크리스천이라면 성경이 얘기하는 창조를 진화론의 용어로써 재해석하는 데에 저항감을 느낄 수밖에 없으며, 이는 거꾸로 진화론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창조가 됐든 진화가 됐든 기원(Origin)이라는 문제는 그 자체가 소위 과학적 방법론으로썬 해결 불가능한 것이다. 다만 과학적 방법론을 동원한 형이상학의 구축만이 뒤따를 뿐이다. 찰스 다윈 이후 진화론은 현대 과학의 형이상학으로 군림하면서 언제나 과학의 발견을 오염시키고 왜곡시켜 왔다. 즉, 진화론은 과학적 사실과는 상관 없이 그 자체로써 하나의 이즘으로 작용해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창조와 진화의 조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나 신학자들을 모두 -혹 그들이 품고 있을지도 모를 선량한 의도와는 별도로- 일종의 '사이비 전도사'로 보고 있다. 이들은 그저 20세기에 이르러 극에 달한 '과학주의(Scientism)'의 병폐가 낳은 시대의 부산물일 따름인 것이다.

다윈 이후 진화론은 그 내부에서 끊임없는 소진화(microevolution)를 일으키고 있다. 교과서에 기술되어 있는 질서정연한 모습과는 달리, TV 등의 대중 매체에서 곧잘 접할 수 있는 컴퓨터 그래픽을 동원한 아름답고 장엄한 묘사와도 달리, 진화론은 사실상 '진화'라는 형이상학적 대전제만 남아있을 뿐, 제대로 정리된 것 하나 없이 무수한 학설과 억측만 중구난방으로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위니즘의 골격인 자연선택과 점진적 변이가 철저히 무시되고 있는가 하면, 한편에선 20세기 생물학의 총아인 분자 생물학의 성과들을 엉뚱한 방식으로 끌어들여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단속 평형설'이라든가 '이마니시설', '중립 진화설', '바이러스 진화설' 따위가 그러한 좋은 예이다. 이제는 이른바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완성과 함께, 다위니즘의 적손(嫡孫)이라 할 수 있는 에드워드 윌슨이나 리처드 도킨스류의 천박한 사회 생물학적 사고가 각광을 받으면서 제2의 우생학 시대가 열리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까지 생기고 있다.

지난 20세기를 주름잡던 거대 담론들이 하나하나 비판의 도마 위에 올라 해체되고, 심지어 무시당하는 일까지 거리낌없이 나타나는 세상이 되었건만, 다위니즘과 이에 기반을 둔 진화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철옹성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진화론의 과학적 사실성을 입증해 주는 단서는 못 된다.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라 신념 체계이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그러하듯이 일종의 해석학적 담론에 지나지 않는다. 프로이트가 그토록 과학적 엄밀성에 기초하고 있다고 역설했던 정신분석학도 결국 시간의 흐름을 극복하지 못한 채 자연과학으로부터 해석학으로 그 지위가 격하되었다. 이처럼 진화론 역시 언젠가는 시간의 흐름을 이겨내지 못하고 우리의 관심 밖으로 사라져갈 것이 분명하다. 그 어느 것도 신성할 것이 없는 황폐한 시대. 이에 대한 반동인가? 지금도 필자는 사람들이 허점투성이인 진화론을 왜 그토록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또 신성화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2001/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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