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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위니즘과 과학의 의미
3장까지 논의를 해 오면서 필자는 다위니즘이 하나의 과학 이론이기에 앞서 얼마나 시대적 상황에 충실한 산물인가를 강조했다. 이러한 점에서 필자는 과학에 대한 20세기의 산뜻한 이미지에 대해서도
강한 의문이 생겼다. 즉, 과학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인데 과연 전통적인 견해대로 객관적이고 합리적일 수만 있느냐는 것이다. 본 4장은 이에 대한 필자의 해답이다. 그 골자는 과학의 객관성이라든가 합리성, 논리성,
추시(追試)의 신뢰 따위는 일종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긴 빈 학단(Wiener Kreis)에서 비롯된 논리 실증주의의 과학론이 이미 맹공을 받아 무너진 상태이고 보면, 이러한 필자의 견해가 별 새로울 것도 없다.
다위니즘도 이러한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과학을 직업으로 하는 이른바 과학자 중 상당수가 과학 자체에 대한 숙고의 결여로 대개의 경우 철학자나 역사학자, 사회학자들이 형성해 놓은 과학 이데올로기 내지 과학의
이미지를 아직까지도 별 이의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교육받은 탓도 있겠지만, 문제는 과학자 사회의
현실이 그렇지 못함에도 과학이 특히 철학자들의 생각대로 논리적이고, 객관적이며, 순수하게 이성적이라는 '환상'과, 과학자는 마치 수도사처럼 사리사욕과 명예를 좇지 않고 오로지 진리 탐구에 매진하는 초월적
존재이어야 한다는 '이상(理想)'을 과학자들이 '현실'로 받아들인다는 데에 있다. 과학자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 역시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터라 현대 사회에서 과학자는 아직껏 영웅 대접을 받는다. 또, 경쟁의
무수한 패배자는 곧 잊혀지고 성공한 과학자-아인슈타인, 보어, 페르미, 웟슨, 크릭, 생거, 콘버그 등-만이 과학의 전형인 양 인식된다. 그렇기에 우리나라에서도 노벨상만이 과학의 전부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으리라.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과학론이란 비과학자의 견해에 과학자가 맞장구를 치고 나면 비과학자는 그 맞장구에 또 맞장구를 치는 식의 순환 논법에 의해 보다 정교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과학자 스탠든(Anthony Standen)은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익살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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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옷을 입은 과학자가 시시각각으로 현미경이나 사이클로트론에서 눈을 돌리고 일반 국민을 위해 어떤 발표를 하면 그 과학자의 발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있지만, 그래도 그 과학자의
발표는 신뢰를 받는다. 과학자의 말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치가, 실업가, 성직자, 시민의 지도자, 철학자 이런 모든 사람들은 의문을 일으키게 되는 일도 있고 비판을 받는 일도 있지만,
과학자들은 결코 그런 일이 없다. 과학자들은 높은 곳에 서서 명성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과학자들이 공식처럼 말하는 문구가 있는데, 그 문구는 '그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라는 문구이다. 이 문구는
불찬성의 모든 가능성을 배제해 버린다.
이 세상 사람들을 과학자와 과학자가 아닌 보통 사람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런 보통 사람들은 과학이 이룩한 놀라운 업적을 보고 크게 감동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위압을 받고 있다. …과학은
너무나도 많은 업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과학이 그 어떤 과오를 저지를 리는 결코 없다고 하며 그렇게 신임을 한다.
이런 추종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성격이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자기 자신들에 대한 그들 보통 사람들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또 한편으로는 보통 사람들은 과학자들에 대한 정보를
과학자들 자신을 통해 얻고 있다. 이리하여 과학자와 보통 사람 사이의 그 모든 현상은 마치 회전 놀이 기구 돌아가듯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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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긴 인용이 반드시 사실을 사실대로 표현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고, 국내 현실이 과학에 어떤 불신마저 드러내고 있는 시점에까지 이른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틀렸다고 볼 수만도 없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도대체 수세기 동안의 과학 전통을 경멸하는 듯한 이러한 발언이 다위니즘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세계관 운운의 차원을 떠난 순수한 과학 방법론의
차원에서 다윈의 방법론을 논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이러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윈 방법론의 핵심은 표면상으로는 '귀납법'이다. 필자는 이 귀납법에 대한 논의를 시작으로 다위니즘과 과학의
의미와의 상관 관계를 고찰해 보려는 것이다.
오늘날, 과학 철학에서 과학의 논리성이라는 신화는 이미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럼에도 이 신화에서 파생된 표준적인 과학 방법론, 즉 관찰로부터 과학이 출발한다는 귀납주의는
아주 일반적으로 과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실상은 전혀 반대의 방법을 채용하고 있으면서 말이다. 흔히 과학 교과서의 서두를 장식하는 귀납주의적 방법론이란 극히 단순화시킨 것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잠깐 살펴보면 과학 지식이란, 경험적인 관찰과 반복된 실험을 통해 얻어진 사실의 토대 위에 가설이 제시되고, 이 가설이 검증(verification)을 거쳐 법칙ㆍ이론으로 정립됨으로써 얻어진다고 본다. 나아가
이에 의거, 연역적인 예측과 현상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과학 지식의 누적은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폭을 넓히는 데 기여함으로써 인간 지식 역시 끊임없이 진보해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귀납주의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핸슨(Norwood R. Hanson, 1924-1967)이 말한 '관찰의 이론 의존성(theory-laden observation)'이라든가, 혹은 아인슈타인이 하이젠베르크(Werner
K. Heisenberg, 1901-1976)에게 말한 바 있는 "우리가 무엇을 관찰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이론이다. It is the theory which decides what we can observe."로 대표되는 견해에 의해 결정적인 타격을
받는다. 즉, 과학자의 객관적이고 반복적인 관찰에 의해 과학이 시작된다는 귀납주의적ㆍ경험주의적 발상은 이론이 관찰과 실험을 유도한다는 현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론을
테스트하고 밝혀내기 위해 관찰과 실험을 실시하는 경우 오직 이러한 목적과 관련이 있는 관찰만 기록된다. …과학적 지식을 구성하고 있는 잘못되고 불완전한 이론이 관찰자가 잘못된 관찰을 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막연하게 관찰 사례들을 무한히 기록함으로써가 아니라,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이론을 개선하고 확장함으로써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불완전한 이론과 더불어 그릇된 결과를 유도할 수 있는 것이 이른바 '자기 기만에 의한 관측 데이터의 왜곡'이다. 이러한 속임수는 의도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명예욕, 경쟁심, 예상되는 실험 결과에
대한 집착 따위의 인간적인 요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실상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아서 그렇지, 크게 문제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데이터 취사 선택 행위는 과학자 집단 내에서의 공공연한
관례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부분적으로라도 이러한 인간적인 요소들에 의해 과학 이론이 구축되어 가는 것이 사실이라면, 과학의 절대적 객관성이란 진정 하나의 신화에 불과한 것이다. 게다가
과학자 집단 내에서의 자정(自淨) 시스템의 일종인 '추시(追試)'라든가, '게재에 앞선 투고 논문 심사'라는 것도 사실은 별로 신뢰할 게 못 된다는 것이 브로드(William Broad)와 웨이드(Nicholas Wade)의 주장이다. 이는
그들의 공저인 <배신의 과학자들 Betrayers of the truth>에 잘 논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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