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cellany
 on PHILOSOPHY 세계관으로서의 다위니즘에 관한 논고 - 7/10  

초점을 다시 다윈과 그의 이론으로 돌리기로 하자. 다윈은 표면상으로는 앞서 비판한 바 있는 귀납주의의 신봉자였다. 19세기 영국의 과학 풍토가 귀납주의적 방법론의 우월성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다윈이 고등한 연역적 추리를 생물학에 적용하는 것에 비판적이었고,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식 경험론에 충실했다는 것은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얘기로 들린다. 실제로 다윈 자신, "나는 진정으로 베이컨적인 원리에 입각해서 연구했다. 그리고, 사실을 아무 이론적 체계 없이 대규모로 수집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규모 수집의 상당수가 비글 호 항해시에 이루어졌음은 이미 앞서 언급한 바가 있다. 게다가 그의 자서전에 "내 마음은 사실의 많은 수집물로부터 일반적인 법칙을 끌어내는 기계가 되어버린 것 같다" 라는 불평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다윈이 의심할 여지 없이 정통적인 귀납주의자라는 확신을 갖게 만든다. 하긴 다윈이 최초로 생물 진화에 대한 노트를 작성한 것은 비글 호 항해를 마치고 귀국한 이듬해인 1837년의 일이었지만, 정작 <종의 기원>이 첫선을 보인 것은 1859년의 일이었고 보면, 다윈이 귀납주의자였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그 사이 20여 년을 다윈이 방대한 사실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학설을 체계화하느라 소비한 것이 아니었겠느냐는 생각을 할 만도 하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다윈은 그 20여 년 간 비록 사이사이 지질학과 동물학에 관련된 저술들을 발표하느라 중단한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자신이 애초 품었던 진화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키고 보다 정교화하는 작업에 매진했을 뿐이다. 즉, 수집한 사실로부터 이론을 끌어낸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론을 설정해 놓고 이에 부합되는 증거들을 찾았던 것이다. 이러한 이론의 정교화 작업은 다윈이 이 기간 동안 각각 두 차례(1842년, 1844년)에 걸쳐 진화에 대한 개요(槪要)를 작성했었다는 사실로써 간접적으로 입증된다. 개요의 분량도 1842년에는 35페이지에 불과했던 것이 1844년에는 230페이지로 늘어나게 된다. 그래서 다윈은 전자를 'sketch'로, 후자를 'essay'로 각각 구분하여 이름 붙이고 있다.

1844년의 개요의 경우, "면밀한 논증의 뒷받침을 가진 시론(試論)"이었음에도 왜 다윈은 발표를 미루다가(다윈은 이 시론을 오직 식물학자인 후커에게만 보여 줬을 따름이다), 1858년에야 그것도 자신의 의지가 아닌 월리스가 보내 온 논문에 충격을 받아 비로소 그 일부를 발표하게 되었을까? 그 근본 원인은 다윈의 건강 상태와, 특히 그의 소심한 성격(좋게 말하면 신중한) 탓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자기의 학설로 인해 파급될 충격과 함께 격렬한 논쟁이 발생할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의 소심한 성격은 이러한 예상되는 반감을 꺼렸을 것이며, 실제로도 그는 <종의 기원> 출간 이후 자기 학설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공식 토론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한편, 다윈은 "진화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인 증거로부터 추론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문제는 가능한 한 대량의 간접적인 증거를 수집함으로써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상되는 논쟁에의 공포와 함께 바로 이러한 이유가 다윈으로 하여금 학설의 보강을 위해 20년이라는 세월을 소비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지체로 인해, 다윈은 1856년 라이얼과 후커(Joseph D. Hooker, 1817-1911)의 독촉으로 <자연선택 Natural  selection>이라는 제목 하에 진화론에 대한 본격적인 집필에 들어갔음에도 2년 뒤인 1858년, '월리스 충격'으로 인하여 이를 포기해야만 하는 불행을 맛보게 된다. <종의 기원>이 본래 계획했던 이 <자연선택>의 축소판(약 1/3 분량)임은 이미 알려진 대로다. 여하간 다위니즘이 순수한 귀납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은 3장의 논의를 통해, 또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너무나 순박한 믿음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별 이상할 것도 없지만, 다윈은 이러한 귀납주의에 대한 단순한 믿음을 본인 스스로 포기했다. 이는 <종의 기원> 초판 출간 다음 해인 1860년, 라이얼에게 보낸 편지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론을 정립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관찰도 할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결국 다윈 역시 관찰의 이론 의존성을 절실히 깨달은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종의 기원> 집필 이전에 이미 형성된 것이 확실한데, 이는 <종의 기원> 초판 서론에 언급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솔직한 표현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왜냐 하면 나는 이 책에서 내가 도달한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에 제시할 수 없는 몇 가지 사실들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정한 결론은 쌍방의 문제점 사이의 사실들에 대하여 완전한 진술과 균형이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얻어질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 일이 불가능하다."

이는 다위니즘이 객관적인 사실로부터만 도출된 자명한 이론이 아닌, 목적에 부합되는 사실의 수집만으로써 이루어진 이론임을 다윈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가 방대한 증거 자료의 수집으로 생물의 진화를 과학적으로 설득력 있게 보여 주려 했고, 또 그것이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Page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Previous | Next Page  
| TOP | HOME |
| FILM REVIEW | MISCELLANY | WHO IS PINHEAD? | MAIL |
Pinhead's World since 2000
Copyright © 1990 by Taekjoong Kim. All rights reserved.
This site is best viewed at 1024 * 768 resolution & 32 bit true color on Microsoft IE 5.0 or hig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