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종합과 전망
리프킨은 그의 저서 <알제니>에서 지금까지 학계의 활발한 비판과 토론의 대상에서 제외된 한 가지 성역이 존재해 왔는데, 그 성역이란 바로 진화론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20세기 세계관의
출발점이 바로 이 진화론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리프킨이 맹공을 퍼붓고 있는 이 진화론이란 '진화' 그 자체가 아니라, '다위니즘'과 그 후 20세기 들어 집단 유전학의 성과에 다위니즘을 결합한 '현대
종합 이론(modern synthesis theory)' 혹은 '신다윈적 종합 이론(neo-Darwinian synthesis theory)'을 가리키고 있는 데 불과하다 [이 종합 이론의 대표적 인물로서 도브잰스키(Theodosius Dobzhansky, 1900-1975),
줄리안 헉슬리 같은 사람을 꼽을 수 있다. 흔히 이들 종합론자들을 가리켜 통칭 네오 다위니스트(neo-Darwinist)라 부르는데, 바이스마니즘(Weismannism) 역시 네오 다위니즘이라 부르고 있기 때문에 네오 다위니스트라는
명칭은 그다지 정확한 것이 못 된다. 바이스마니즘과의 불필요한 혼동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리프킨은 진화를 인류 미래를 위한 적극적인 처방전으로 이용하고 있다. 때문에 그는 다위니즘을
비판하면서도 다위니즘과 진화를 명확히 구분 못하는 혼란을 보이고 있다.
1980년 이래로 다위니즘과 자연선택설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음은 사실이다. 리프킨이 아니더라도 여러 진화학자들이 내놓은 새로운 학설에 의해 다위니즘은 격렬한 공격을 받고 있다. 이들 비판적인
진화학자들은, 그러나,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난 생명의 진화만큼은 엄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즉, 다위니즘은 진화를 설명하려는 여러 이론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실
다윈마저도 자연선택만이 진화의 유일한 원동력이 아님을 확신한다는 말을 <종의 기원> 제1판 서론 끝에 언급하고 있긴 하다]. 따라서 이들은 다위니즘에 관한 한 슈펭글러(Oswald Spengler, 1880-1936)의 "경제학으로
생물계를 그대로 해석한 것보다 약간 나은 정도"라는 비판을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지 모른다. 심지어 이 말에 진심으로 동의할지도 모른다. 다위니즘으로 인해 진화는 비로소 과학으로까지 부상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도대체 진화가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 가능한 것인가? 다위니즘을 부정하면서도 진화만은 사실로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진화란 어쩌면 과학적 탐구 대상이기 이전에 하나의
신앙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진화를 받아들이는 것도 진화가 하나의 패러다임으로서 우리 사고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철저하게 유물론적이고 철저하게 무신론적인 진화론이 당당하게 세계관의
하나로까지 성장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그 중심에 위치하게 된 것은 20세기가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나 로빈슨(John A. T. Robinson) 같은 신학자들의 주장처럼 신(神)이라는 작업 가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성숙한 세계로 접어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유물론 철학에 경도됨으로써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구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진화론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진화는 인간 의식의 차원으로까지
승화되었고, 더욱더 집요한 믿음의 대상이 되었다. 신적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소위 휴머니스트들에게 진화는 더할 나위 없는 안식처요, 신앙이다.
반증(falsification) 가능한 것만이 과학이라고 포퍼(Karl R. Popper, 1902-1994)는 말한 바 있다. 또한 그는 과학 이론이
과학이기 위해서는 이론에 대한 반박과 비판에 언제나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포퍼에게 있어 과학 이론이란 반증을 막아내고 있는 동안만 이론으로서의 자격이 부여되는 잠정적인 진리에 불과하다.
모순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바로 이런 까닭에 반증 가능성이 높은 것일수록 보다 과학적인 이론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결국 형이상학적인 언명이 과학적이 될 수 없는 이유는, 포퍼의 견해대로라면 반증이나
비판에로의 개방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 된다. 이러한 반증주의를 바탕으로 포퍼는, 역사에 일정한 법칙이 있기 때문에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서 과학임을 자처하는 역사 결정론자들(예를
들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판하고 '열린 사회(open society)'의 옹호자가 되었다. 필자는 제3장에서 진화란 단순히 무목적적인 선택 과정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 법칙주의임을 논증해 보았다. 포퍼의
견해대로라면 진화론이란 그 어느 과학 이론보다 과학적이라고들 주장하고 있으므로 반증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반증하려 들면 정작 반증 불가능한 것이 진화론이다. 진화는
그야말로 인간 사고를 지배하는 영원한 진리가 되어 버렸는지 과학자들은 진화라는 패러다임 안에서 문제 풀이에 열중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포퍼의 반증주의는 역시 논리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고
과학의 역사성을 무시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더욱이 포퍼는 자신의 반증주의와는 모순되게 진화를 자기 철학의 가장 중요한 인식론적 기초로 삼고 있다. 결국 열린 사회를 옹호한 포퍼 역시 진화 패러다임의
한 희생자일 뿐이다.
한편, 1970년대의 에너지 파동 이래로 물리학의 엔트로피(entropy) 증가의 법칙이 그 중요성을 인정받게 되면서 진화론자들은 생물학적 진화와 이 원리와의 조화를 꾀하는 시도들을 해 오고 있다.
국내에도 이러한 시도를 담은 서적들이 상당수 번역돼 나왔는데, 프리고진(Ilya Prigogine)이나 얀치(Erich Jantsch), 카프라(Fritjof Capra) 등의 저술들이 꽤 자극을 준 모양이다. 그러나 혼동과 질서의 조화를 이루려는 이들의
발상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며, 과격한 말로 표현하자면 진화 패러다임을 좀더 연장시켜 보기 위한 부질없는 헛수고에 불과할 뿐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러한 시도가 지적 유희의 대상은
될지언정 참된 과학적 결과를 산출해 내는 보고(寶庫)가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진화론은 필연적으로 생명이 물질로부터 자연 발생한다는 결론으로 우리를 유도해 간다. 우리는 생명이 자연 발생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의 견해에 대해선 비웃음을 아끼지
않으면서, 오파린(Aleksandr I. Oparin, 1894-1980)의 자연 발생설에 대해선 진지한 자세를 취한다. 오파린의 것이 보다 과학적이기 때문에? 만물이 자연 발생한다는 발상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심지어 중세 유럽에서도, 또
오늘날에까지 옷을 바꿔 입어가며 대두된 하등의 새로울 것도 없는 사상일 따름이다. 도대체 인간이 무에서 유의 창조라는 성경적인 발상을 한 자체가 희한한 일이다. 물질에서 물질이 발생한다는 것이 인간에게는
더욱 자연스런 사고의 종착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본부터 진화라는 사실 자체에 의심을 품어 봐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인간 역사가 진정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는 참된 출발점이 아닐까? 우리가 진화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어쩌면 진정한 우리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선 '과학의 영웅 다윈'을 비신화화(非神話化)해야 한다. 신학자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이 2000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를 비신화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인간 예수로 격하시키려 했다면, 불과 100여 년 전의 다윈이라고 해서 비신화화하지 못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이 글은 다윈의 비신화화를 위해 쓰여졌다. 다윈은 더 이상 보호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