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cellany
 on PHILOSOPHY 세계관으로서의 다위니즘에 관한 논고 - 8/10  

다윈은 어째서 귀납주의의 허점을 일찌감치 깨닫지 못했을까? 단순히 당시의 과학 풍토가 그러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별 설득력이 없다. 보다 근원적인 원인 설명은 아무래도 19세기 생물학, 즉 박물학(博物學, natural history)에 대한 고찰을 필요로 한다.

19세기에 생물에 대한 통일된 이론 체계로서 세포설(cell theory)이 확립된 것이라든지, 생화학과 미생물학에서의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 코흐(Robert Koch, 1843-1910) 등의 업적은 빛나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이들은 20세기 생물학의 중요한 토대가 되는, 말하자면 그것만으로 완전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20세기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이런 의미에서 박물학은 19세기 생물학의 완성된 모습이었다. 박물학은 물리학적 방법론이 적용되고 있는 오늘날의 생물학(특히 분자 생물학)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사실 생물학(Biology)이란 용어 자체가 박물학에 정연한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해 1802년에야 비로소 라마르크(Jean-Baptiste de Lamarck, 1744-1829)에 의해 만들어진 용어였다. 과학사가 길리스피(Charles C. Gillispie)는 이렇듯 생물학이란 말이 만들어지기 위해서 19세기까지 기다려야 했다는 사실에서 생물학이 이제 겨우 시작 단계의 학문이라는 희망 있는 말을 하고 있다. 실제로 그 이전 16, 17세기에 생물학은 독립적인 존재가 못 되고, 다만 뉴턴의 물리학에 의해 정립된 기계적 세계관의 일부를 설명하는 정도의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다. 이렇게 이 분야의 지식이 어떤 객관적인 개념 또는 이론에 의해 조직되지 못함으로써 19세기에 다위니즘이라는 자연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이 나타날 때까지 '엄청난 지식의 단편'만을 여기저기에 흩뿌린 채로 남겨 놓았다. 박물학이라는 학문의 형성은 이 같은 중심 개념 결여의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길리스피는 박물학에 대해 매우 적절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우선 박물학이란 "세부적인 것을 분류하여 결국은 하찮은 것의 서열에 따라 정신도 권태에 빠지고 마는 저 살아있는 자연에 대한 기술(記述)적 연구"라는 것이다. 박물학이란 상당히 포괄적인 학문이어서 동물학과 식물학뿐만 아니라 광물학, 지질학도 포함하는 학문이었다. 따라서 다윈이 지질학에서 생물학으로 관심을 옮긴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윈은 박물학자였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한편, 기술(記述)이라는 측면 외에도 박물학은, 길리스피에 따르면 "탐구자적 정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새의 관찰자나 모럴리스트의 정신으로 추구되었다"는 것이다. 즉, 아마추어 냄새를 물씬물씬 풍기는 사람들이 전문적인 지식 없이도 시작할 수 있었던 분야였다는 말이다. 다윈이 목사 지망생에서 박물학자로 전향한 사실이나, 월리스가 토지 측량 기사에서 박물학으로 직업을 바꾼 사실은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다윈이나 월리스 모두에게 흠모의 대상이었던 박물학자 훔볼트의 남아메리카 여행 이후 유럽인들은 열대라든가 밀림 따위의 이국(異國) 정취에 매료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분류학과 비교 해부학, 나아가 고생물학의 발전에 따른 신종(新種) 표본 채집의 열기는 전문 박물학자의 자격으로서 동식물의 채집과 이의 박제 기술 습득 정도만을 요구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박물관이나 개인 수집가들에게 채집한 표본들을 파는 것만으로도 생계 유지가 가능했던 것이 빅토리아 시대로 대표되는 19세기 영국의 상황이었다.

박물학이 분류학의 강한 영향을 받는 일종의 자연 기술(記述) 작업이었다는 사실과 광범위한 표본 채집 작업이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다윈이 아마추어 박물학자로서 비글 호 항해를 시작한 초기까지만 해도 바로 이 박물학의 생리라는 것으로 인해, 연역적 추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귀납주의적 방법에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았음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박물학의 기본 작업인 '채집'과 '동정(同定)'은 귀납주의의 가장 충실한 반영이다]. 그러나 귀국 후 다윈이 종의 기원이라는 사변적인 의문에 직면하여 그 해명을 시도하게 되면서부터 그는 귀납주의의 한계를 곧바로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비글 호 항해시 관찰한 사실이나 수집 표본을 기록한 다윈의 수많은 노트에서 진화 사상에 대한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귀국 1년 뒤인 1837년 생물 진화에 대한 노트를 처음 작성하는 시기에 이르렀을 때 다윈의 자연관은 급속한 변화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윈이 정확히 언제부터 진화론적인 발상을 갖게 되었는가를 확인한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필자는 과학론적인 입장에서 보더라도 과학은 한 시대의 문화 현상의 일부이지 과학 그 자체로서 특별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논증해 보이려 했다. '관찰의 이론 의존성'과 '과학은 당대 세계관의 반영'이라는 견해 앞에서 과학의 엄밀한 객관성은 부분적 으로, 또는 경우에 따라 완전히 부정될 수 있다. 이런 생각이 가능한 것은 과학의 주체가 과학자라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즉, 과학이 최대한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필자는 과학의 이러한 면까지 무시할 생각은 없다. 바로 이 때문에 귀납주의에 대한 절대적인 반박은 불가능하다], 그 주체가 바로 인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과학의 객관성 속에는 인간의 선입견과 편견, 또는 철학, 신앙, 심지어 파벌 의식까지도 가미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과학자가 어떤 새 이론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섰을 때에도 그는 그 이론이 과학적이어서라기보다는 자기의 '구미(口味)'[학문 세계에 국한시켜 말한다면 이 '구미'란 과학자 개인이 기존의 어떤 학설을 취하고 있느냐를 가리킨다]에 맞기 때문에 일단 받아들이거나 혹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다. 새 이론이 과학적으로 타당한가의 여부는 차후 문제이다. 다위니즘의 경우는 이러한 실례(實例)로서 가장 적절한 본보기라 할 수 있겠다.

다위니즘은 수용자로서의 과학자의 입장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경우이다. 토마스 헉슬리(Thomas H. Huxley, 1825-1895)가 <종의 기원>을 읽고 나서 다위니즘에 완전히 경도(傾倒)되어 훗날 '다윈의 불독'이라는 별명까지 붙어가며 다윈의 지지자가 된 것은 다위니즘이 과학적이었다는 이유보다는 헉슬리의 기본 철학이 유물론적이고 무신론적이었으며, 당대의 자유방임적 사회 분위기를 적극 수용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헉슬리가 다윈과 마찬가지로 자신은 불가지론자라고 말한 바 있지만, 불가지론이란 무신론의 고상한 형태에 불과할 뿐이다]. 반대로 미국의 박물학자 애거시(Louis Agassiz, 1807-1873)가 다위니즘을 즉각 거부한 것은 그가 기본적으로 성경적 창조론자였기 때문이다. 라이얼이 처음에는 다위니즘을 수용 못하다가 뒤늦게 받아들인 이유도 그가 <종의 기원>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유물론적인 철학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과학에 지나친 회의를 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못 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과학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 내지 자신감이다. 자연의 일부 현상을 설명하는 데 불과한 -게다가 그나마 완전하지도 못한- 과학 이론의 설명 방식이 하나의 이즘으로서, 하나의 세계관으로서 인간 사고를 지배하고 획일화하는 데 이용된다면 크나큰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진화에 대한 무서우리만치 과감한 신뢰를 바탕으로 인류 유전자를 개량하여 인류 진화에 적극 개입하자는 사람들의 우생학적인 사고 방식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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