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cellany
 on PHILOSOPHY 세계관으로서의 다위니즘에 관한 논고 - 5/10  

각설하고, 다윈은 라이얼의 지질학 체계를 받아들이긴 했으나, 그가 균일설에 근거한 생물 진화론의 구상을 하게 된 것은 항해 당시가 아니라 귀국을 전후로 한 무렵이었던 것 같다. 다윈이 라이얼에게서 주목했던 것은 자연은 점진적으로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었다. 즉, 지구는 신의 의지에 의해 그때그때 일어나는 홍수로 생물이 멸절되고 다시 창조되는 '신의 공작실'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이는 '자급자족의 기계'와 같다는 생각이었다. 다윈이 이 점진적 변이설에서 도출해 낸 것은, 자연이 계속 변하는 것이라면 생물 역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자신도 계속 변해야 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게 되자 다음으로 필요한 작업은 종의 변화에 대한 그럴듯한 메커니즘의 발견이었다. 맬서스의 <인구론>은 바로 이 메커니즘을 알아내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됐다. 그 메커니즘이 바로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설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라이얼 자신은 종의 변화를 인정치 않았다는 점이다. 라이얼이 균일설을 주장하면서도 창조론적인 생물학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음은 다윈에게 모순으로 느껴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라이얼은 <종의 기원>이 출간된 이후에도 종의 변화, 즉 진화를 인정치 않다가 마침내는 다윈의 견해를 받아들이게 된다.

다윈이 비글 호 항해 이후 당대의 이단설-신이 창조가 아닌 진화를 통해 역사했다는 이신론적 발상-들보다 훨씬 과격한 입장, 즉 신의 손길을 배제한 채 오로지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이라는 물리적 수단만을 통하여 진화가 이루어졌다는 진화 그 자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위니즘은 그 근본이 유물론적이다. 이러한 다윈의 사고 방식으로 인해 다위니즘은 공산주의의 유물론 철학에 쉽게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는 <종의 기원> 초판이 런던에서 출간되자마자 곧 구입하여 읽은 것 같은데, 동료 마르크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윈이 신학을 분쇄했다는 둥의 어리석은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로부터 1년 뒤에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보내고 있다. "나는 4주 간의 시련 중에 많은 책을 읽었다. 다윈의 자연선택도. 제시 방법은 비록 영국식으로 조잡하나, 이 책은 우리의 이론에 대한 기초를 박물학적인 면에서 구축해 주고 있다고 본다." 신학자 벤츠(Ernst Benz)는 그 이후 벌어진 일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난폭한 (이) 한 마디 말로, 마르크스는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합병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의 사상적 기초로 삼았다. 이 합병은 중부 유럽에서의 다위니즘의 운명을 결정하였다. 그 때부터 다위니즘은 마르크스적, 공산주의적, 유물주의적 사상의 필수 부분이 되고, 사회주의적 우주관의 토대가 되었다."  후에 마르크스가 자신의 저서 <자본론>을 다윈에게 헌정했을 때, 다윈이 자기 이론의 평판이 흐려질 것을 염려하여 이를 정중히 거부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2001년 註: 이는 단지 소문일 뿐, 사실이 아니라는 얘기도 있다].


다위니즘이 생물학에 적용된 경제학 같다는 비판을 듣는 이유는 다윈 자신도 인정하고 있듯 맬서스의 영향 때문이다. 다윈은 자기 이론에 대해 "동물학과 식물학에 적용시킨 맬서스 이론"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다윈이 맬서스의 <인구론>을 처음 접하게 된 때는 긴 항해에서 돌아와 생물 진화에 대한 최초의 노트를 작성한 이듬해인 1838년 10월이었다. 자신의 말로는 휴식을 취하는 가운데 "재미로(for amusement)" 읽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심히 의심스런 발언이다. 이 때쯤 그는 이미 종의 변화에 대한 메커니즘의 연구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다윈은 인위적인 가축의 품종 개량에서 무수한 변종이 나올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미 비글 호 항해시 지리상의 격차에 따른 변종의 출현을 목격했던 다윈은 품종 개량시 인간이 하는 역할에 상응하는 선택 작용을 자연에서 찾고자 했다. 맬서스를 읽기 이전에 이미 자연의 다산성(多産性)에 주목하고 있던 다윈은 다산이 생존경쟁을 낳으며, 이 경쟁에 의해 선택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이 선택의 메커니즘이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확신을 얻게 된 것은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고 난 뒤였다. 라이얼에 의해 자연의 변화는 생물의 변이, 즉 진화를 일으킨다는 거시적(巨視的)인 확신을 얻었다면, 맬서스에 의해 진화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생존경쟁에 의한 자연선택이라는 미시적(微視的)인 확신을 얻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맬서스는 경제학에 '음울한 학문(dismal science ; 토마스 칼라일이 경제학을 비꼬아 일컬은 말)'이라는 이름이 붙게 만든 장본인인데, 그의 무책임한 자유방임적 인구론은 사회 복지의 남용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첫째 목표였다고는 하지만,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근본 이념이었던 자유경쟁주의의 반영일 따름이었다. 리프킨(Jeremy Rifkin)은 그의 또 다른 저서 <알제니 Algeny>(국내에는 '엔트로피 Ⅱ'라는 제목으로 번역됐음)에서 이러한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사회 이론을 그대로 자연과학에 도입한 다윈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실제로 자유방임주의 경제 하의 당시 영국 사회에 있어서 그러한 생각은 이미 경제인의 상식으로 되어 있었다. 즉, 그것은 '경쟁이 심한 산업계를 헤쳐 나가며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적자(適者)만이고, 우수한 자가 승리하고 열등한 자가 패한다는 법칙은 엄연히 작용한다'라는 것이고, 다윈의 진화론은 이러한 인간이나 사회 관찰에 근거를 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자유방임의 논리는 개인주의의 미덕을 권장하며, 자유경쟁에 의한 우승열패(優勝劣敗)의 결과 사회에는 적자만이 번영하는 건강한 사회가 이루어진다는 진보 사상을 감추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다윈의 자연선택설이 얼핏 보면 비진보적이고 무목적적인 듯함에도 불구하고 '진보라는 신화의 생물학적 표현'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즉, 종이 자연선택에서 살아남아 적자로서 번영하기 위해서는 종 전체의 '개량'이 수반돼야 하는데, 다윈에 따르면 개량이란 "각 생물의 기관의 분화가 진행되고 또한 각자의 기능에서 성능이 좋아지는 것"을 의미하며, 여기서 '개량에 따른 적자의 번영'이 무한한 진보에의 확신을 나타내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다위니즘이 순수한 자연 관찰의 결과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 아직까지도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내놓을 반증(反證) 자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지면 관계상 두 가지만 더 논의하고 본 3장을 끝맺기로 하겠다.

다윈이 19세기 영국의 사회상을 은연중 자연에 고스란히 적용시켰다는 사실은 산업혁명기 영국의, 보다 구분하여 말하자면 산업 자본주의 시대 영국의 시대상을 알아봄으로써 더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특히 영국의 소설가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의 <올리버 트위스트 Oliver Twist>(1838)나 <데이비드 커퍼필드 David Copperfield>(1850) 같은 작품을 통해 당시 영국의 비참하리만큼 치욕적인 노동 조건과 냉엄한 생존경쟁의 논리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악랄한 착취 행위를 자행하여 빈부, 신분의 격차가 엄청났던 영국에서 대륙과 같은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도리어 이상할 정도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연기를 내뿜고 있는 공장 굴뚝으로 뒤덮인 당시 도시들의 풍경이었다. 다윈은 화산암으로 뒤덮인 갈라파고스 군도의 황량한 자연 조건에 경악하면서 바로 이러한 영국의 그림자를 보았던 것이다. 실제로 다윈은 갈라파고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회상을 하고 있다. "거대한 주철 공장이 가득 몰려있는 스태퍼드셔(Staffordshire) 일각을 보는 것 같았다" 라고.

한편, 다윈과 거의 똑같은 경로를 거쳐 자연선택설에 입각한 진화론을 확립한 또 한 사람의 영국인이 있었다. 월리스(Alfred R. Wallace, 1823-1913)라는 인물로서, 박물학자로서의 경력이 다윈과 거의 일치할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박물학자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 1769-1859)를 존경한 점,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고 자연선택설을 착안한 점, 심지어 natural selec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점까지 일치했다. 다른 점이라면, 다윈이 연장자라는 사실과 다윈은 부르주아지였던 반면 월리스는 프롤레타리아트 출신이었다는 점, 다윈이 먼저 생물 진화의 연구에 착수했다는 점뿐이다. 두 사람은 각각 독자적으로 같은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에, 1858년 뉴기니 섬 북쪽의 몰러카스(Moluccas) 군도에 머물고 있던 월리스가 자신의 연구 결과를 정리한 짤막한 논문을 다윈에게 부치기 전까지 둘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두 사람의 논문은 같은 해 런던의 린네 학회(Linnean Society)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이러한 우연의 일치가 빅토리아 시대에 두 사람이나 되는 영국인에 의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다위니즘이 순수 자연과학적인 이론이 아니라 시대의 산물임을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다.

다위니즘은 시대적 상황을 충실히 반영한 이론이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다위니즘은 제국주의 시대의 정치 이데올로기, 인종차별 정책, 우생학(優生學), 공산주의의 계급 투쟁설, 나아가 파시즘의 기본 원리로까지 이용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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